[이재호 칼럼]이제는 背後에 눈 돌릴 때가 아닌가

  • 입력 2006년 11월 24일 19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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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진보 또는 좌파를 구분하는 기준에 북한의 핵실험과 유엔의 대북(對北) 인권결의가 추가된 것은 다행이다. 같은 좌파라도 핵실험을 용인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따라 갈리는데 이런 분화(分化)가 이념 갈등을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된다. 6·15 공동선언실천위원회 남측 대표인 백낙청 씨가 23일 “타성에 젖어 있던 통일운동이 핵실험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 말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그는 북핵 폐기를 끝까지 주장해야 한다고 했다.

대북 인권결의를 놓고도 정부가 찬성표를 던진 데 반대하는 좌파가 있는가 하면, 불가피했다고 생각하는 좌파도 있다. 민주노동당 내의 민족해방(NL) 계열이 전자이고, 민중민주(PD) 계열이 후자다. 붉은색이라고 해서 다 한 색(色)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국어학자들에 따르면 ‘붉다’는 뜻을 나타내는 우리말은 56가지나 된다고 한다.

색이 세분될수록 좌우 접점 찾기도 쉬워진다. 예컨대 북의 핵실험도 반대하고, 인권 탄압도 반대하는 좌파라면 보수 우파와 언제든 대화가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외연을 넓혀 가면 결국 골수 친북좌파만 남게 된다. 핵실험을 “선군(先軍)사상의 승리”라고 찬양하고 북의 인권문제는 철저히 외면하는 뼛속까지 붉은 그런 사람들 말이다.

北核폐기 주장하고 나선 백낙청

좌파의 분화는 우리 사회의 이념전선(戰線)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떤 이념집단도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오래갈 수 없기에 국민이 혐오하는 극단적 세력과는 스스로 거리를 두려 한다는 얘기다. 요원한 일이지만 좌파의 분화가 ‘진화’로 이어져 유럽의 민주사회당 수준까지 가야 한다. 그런 판에 핵실험을 지지하는 변종 좌파가 설쳐 대니 어떤 좌파가 함께하려 하겠는가.

좌파의 분화는 정치 경제 발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어느 나라 국민이건 웬만큼 먹고살게 되고,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게 되면 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익을 좇아 생각과 행동이 세분되기 마련이다. 이른바 ‘이념의 세속화’다.

문제는 이런 분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좌파가 한 깃발, 한 울타리 안에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투쟁 동력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공청회처럼 보인다. 집단 구성원들이 공청회를 통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합리적인 의견을 듣게 되면 마음이 변해 일탈할 가능성이 높아서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기를 쓰고 교원평가 공청회 개최에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이들이야말로 사상과 이념의 분화를 가로막는 민주사회의 적(敵)이다. 나는 시위 현장에서 죽봉을 휘두르는 좌파보다 공청회를 몸으로 막는 좌파가 더 엄중히 처벌돼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을 추려 내지 않고서는 다원화된 성숙(成熟) 민주사회로 가기 어렵다.

22일의 전국 폭력시위도 마찬가지다. 언제 어디서나 시위 현장이면 나타나는 이들을 솎아 내지 않고서는 시위를 막을 수가 없다. 이들의 행태는 여러 면에서 북한의 통일전선 투쟁 방식과 닮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라는 중앙조직에 의해 7곳의 시청과 도청이 습격당한 것을 단순한 ‘기획 시위’로만 볼 수 있을까.

북은 통상 2개의 통일전선을 운용한다. 하나는 ‘상층 통일전선’으로 남북 정부 간 대화와 지도층 인사를 상대로 한 회유가 이에 해당한다. 보수적인 대북 전문가들은 사석에서 농담처럼 “YS, DJ도 상층 통일전선에 놀아난 거지 뭐!”라고 말 하곤 한다.

폭력시위의 핵심 고리 끊어 줘야

다른 하나는 ‘하층 통일전선’으로 노동자 농민 학생 등을 상대로 한 친북 연대 활동이다. 이번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 농민 교사들이 그 대상이 아니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의 대처는 딱하기만 하다. 경찰의 미온적인 진압을 나무라는 것은 효과도 없고 앞뒤도 맞지 않는다. 현장의 폭력시위자들을 힘으로 제압하려 들면 정말 전쟁이 일어나고 만다. 그보다는 배후의 고리를 끊어 줘야 한다. 좌파를 한 손에 틀어쥔 세력과 순수한 노동자 농민 교사들을 평소에 떼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폭력시위도 사라지고 좌파의 분화도 방해받지 않는다. 좌파가 분화되면 우파와 수렴하거나, 적어도 수구꼴통 좌파와 맞설 합리적 좌파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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