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딸과 15일간의 여행기 책으로 펴낸 김선미 씨

  • 동아일보
  • 입력 2006년 8월 16일 03시 01분


《두 딸은 “엄마에게 사기당했다”고 했다.
엄마는 “힘들고 고생스러웠지만 아이들이 부쩍 자란 것 같다”고 말했다.
길 위에서 보낸 15일에 대한 모녀의 평가는 이처럼 달랐다.》

김마로(12) 한바라(10) 양 자매는 앞 다퉈 ‘사기극’에 대해 설명했다.
“엄마가 전국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빗속에서 고생할 줄도 모르고 좋기만 했어요.”(한바라)
“엄마가 조금만 가면 된다고 해서 아침도 굶고 문경새재를 걸어 오르는데 1시간이나 걸렸어요.”(마로)

“한라산에 올라가길 주저하는 우리에게 100m 오를 때마다 ‘도토리’(사이버 머니)를 주겠다고 하셨어요. 도토리를 100개쯤 받아야 하는데 30개밖에 안 돼요.”(마로, 한바라)

‘사기 행각’이 벌어진 건 지난해 8월. 맞벌이 주부 김선미(37) 씨는 회사를 한 달간 휴직하고 딸들과 함께 15일짜리 자동차 여행에 나섰다.

“당시 ‘좋은 엄마도, 좋은 직장인’도 될 수 없을 것 같아 무척 초조했어요. 회사 일로 밤 12시 무렵까지 야근할 때는 엄마 없이 밥 먹고 잠들었을 아이들 생각에 목이 메었죠. 한 발을 가정에 담근 채 일에 몸을 던지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일도 곤혹스러웠습니다.”

막 사춘기에 들어선 마로와 대화하지 않으면 딸과 친해질 기회가 영영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도 여행 결정에 한몫했다.

경기 광주시 실촌읍에 사는 김 씨는 국도 3호선을 타고 서울로 출퇴근한다. 이 길을 따라가면 끝에 뭐가 있을까. 여행 코스는 국도 3호선을 따라가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 국도의 남쪽 끝인 경남 남해군에서 남편(41)과 만나 딸들이 좋아하는 제주도로 배를 타고 다녀오는 계획을 짰다.

“방학이면 ‘체험학습’ 여행 상품이 줄줄이 나오지만 창의적 방식으로 아이들과 소통하고 싶었어요. 여행은 거창한 계획을 세워 많은 돈을 써야 하는 게 아니라 내 집 앞길만 따라가도 이뤄진다고 생각했죠.”

섬 일정까지 합해 여행비는 100만 원 이하로 쓰기로 했다. 그러자면 텐트에서 자고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어 먹어야 했다.

산악잡지 기자로 전국의 산을 두루 다녀 본 김 씨지만 여자 셋이, 그것도 밤마다 텐트를 쳐 가며 긴 여행을 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여행을 떠나자마자 잇따른 태풍으로 내내 빗속에서 지냈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유명한 관광지는 피해서, 국도 3호선에서 30분 이상 떨어지지 않은 유적지를 간다’는 여행 원칙은 잘 지켜졌다. 그 과정에서 지도에도 없는 ‘까만 부처’(충북 충주시 단월동 단호사 철불좌상)나 ‘바위 부처’(충북 괴산군 원풍리 마애불좌상·보물 제97호) 등을 만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충주를 거쳐 괴산, 문경, 상주, 거창, 산청, 진주, 사천, 남해, 순천, 고흥, 제주, 마라도까지.
아이들은 야영지 텐트에서 밤마다 일기를 썼다.

‘오늘은 여행 첫날이다. 탄금대에 갔다.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다. 신립 장군이 그곳에서 자살하셨다… 밤에는 촛불을 켜고 공부를 했다. 음악도 들을 수 있어서 정말 아늑했다.’(한바라의 일기)

실수도 적지 않았다. 길을 못 찾아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고, 야영장이 만원이어서, 혹은 텅 비어서 발길을 돌려 새 야영지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가다가 길을 잃었다. 경찰서에 가서 길을 묻기로 했다… 나는 깡패들이 잡혀 와서 맞는 그런 경찰서만 생각했는데 경찰서가 한가할 때도 있다는 걸 알았다.’(마로의 일기)

평소에도 자주 다투는 큰딸과는 여행 중에도 그랬다.

하나라도 더 보여 주고 싶은 엄마와 힘들다고 짜증 부리는 딸. 문경 새재 오르는 길에서, 섬진강가에서, 소록도에서 모녀는 소리치고 울부짖다가 끌어안고 울며 화해했다.

‘오늘은 엄마랑 많이 싸웠다. 사실은 내가 엄마한테 힘들다고 짜증을 많이 낸 것 같다. 엄마 미안해.’(마로의 일기)

세 모녀의 여행기는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는 책으로 엮여 나왔다.

아이들이 새롭게 말한다.

“매일 생각했지, 사기당했다고. 하지만 여행을 다녀온 뒤 엄마가 더 편해졌어. 오래 같이 있었으니까…. 엄마가 내 얘기를 더 잘 들어주는 것 같아.”(마로)

“엄마가 강해진 것 같아. 여행 때마다 아빠가 힘든 거 다했는데, 엄마가 혼자서 하는 거 보니까….”(한바라)
엄마도 말한다.

“실은 저 자신이 성장한 것 같아요. 아이들이야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니까…. 전업 주부나 맞벌이 주부 모두 이런 여행 한번쯤 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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