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생각의 나들이, 공인(公人)의 말솜씨

  • 입력 2006년 7월 26일 21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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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마음의 나들이다. 남 앞에서 내놓고 얘기한다는 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문자 그대로 ‘바깥나들이’, 외출한다는 것이다.

몸만 나들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나들이한다. 그래서 몸만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치장을 한다. 사람들은 바깥출입을 할 때엔 기왕이면 다홍치마라 되도록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혹은 입던 옷도 매무시를 고친다. 얼굴에 화장을 하고 머리엔 빗질도 한다.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자고 누구나 다소간은 멋을 부리는 것이다.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바깥나들이를 하는 것이라 되도록 말을 골라서 기왕이면 남의 귀에 듣기 좋도록 알아듣기 쉽도록 바른 말, 고운 말, 재미있는 말, 지루하지 않은 말을 하려 한다. 몸이 멋을 부리듯 마음도 꾸밈새에, 말의 수사(修辭)에 신경을 쓴다.

물론 몸과 말의 멋이나 꾸밈새는 매우 주관적인 것이어서 사람 따라 또는 시대나 지역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기름통에서 뽑은 것처럼 머리를 치장하고 손을 벨 것처럼 주름이 선 새 옷을 차려입은 것을 잘 꾸몄다고 볼 수도 있다. TV에서 보는 우리나라 전현직 대통령들의 모습처럼…그런 멋, 그런 꾸밈새는 우리에겐 아직 낯설지 않다.

그런가 하면 해가 뜬 날에도 우산을 들고 ‘시티’(런던 중심가)를 쏘다니는 정장(正裝)의 은행원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영국의 귀족들은 캐주얼을 아무렇게나 입고 옷을 맞춰도 줄이 선 새 옷이 창피해서 아랫사람에게 한참을 입히고 난 다음 입는다는 얘기를 읽은 기억이 난다. 진짜의 멋, 고도의 꾸밈새란 꾸미지 않은 것처럼 꾸미는 데 있다 할 것인가. 말도 너무 꾸미고 격식을 갖추면 오히려 촌티가 난다. 평상시에도 정장을 하고 기름통에서 뽑아 올린 머리처럼 치장한 말투보다 오히려 꾸밈없는 수수한 말이 더 미쁘고 사람 마음을 끄는 수가 있다.

생각의 외출이란 면에서는 글도 말에 못지않게 나들이 차림이 쉽지 않다.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안다. 그래서 자칫 어깨에 힘이 들어간 초보자일수록 간단한 글도 서론, 본론, 결론의 격식을 차리다 촌스러운 글을 쓰기 일쑤다. 그 바닥 고수들은 캐주얼의 멋쟁이처럼 서론, 본론 따위 아랑곳없이 대뜸 긴요한 얘기의 핵심을 찔러 보여 준다. 현관, 대기실 거치지 않고 바로 안방에 들어가 주인을 만나는 것처럼.

물론 몸과 말을 어떻게 꾸미든 최소한의 공통된 규범은 있다. 벌거벗은 알몸으로 나들이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육체의 나신이건 정신의 나신이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론 바깥나들이를 않는 것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의 예의다. 아무리 욕심나도, 아무리 미워도 벌거벗은 욕망이나 벌거벗은 감정을 그대로 쏟아 내놓지 않는 것이 문명사회이다.

사사로운 대인 관계에서도 그렇다. 나라의 지도층에 있는 공인의 경우 이러한 말의 규범은 더욱 엄중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국가가 국가를 상대하는 외교의 세계에 있어서랴. ‘외교사령’이란 말이 그래서 생겨났다. 농담에도 “여성의 ‘메이비(maybe)’는 ‘예스(yes)’요, 외교관의 ‘메이비’는 ‘노(no)’를 의미한다”는 말이 있다. 외교관은 함부로 속내를 내색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세태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한동안 유럽의 어느 도시 강변에서 대낮에도 남녀가 알몸으로 일광욕을 하는 모습이 화제가 됐고, 이름 있는 극장 무대에 알몸의 배우가 등장하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보았다. 젊은 여성들이 배꼽을 내보이는 것쯤은 한국에서도 모드가 된 지 오래다. 심지어 군중이 모인 시가에서 알몸으로 질주하는 ‘스트리킹’도 지난 세기말부터 시위의 한 형태로 시민권을 얻은 듯싶다.

이렇게 너그럽게 생각해 보니 요즈음 우리나라 정계의 민망하기 그지없는 여러 행태도 이해가 됨 직하다. 가령 대통령 노릇 못해 먹겠다는 말을 처음 듣고 놀랐던 마음, 북한 미사일 발사로 미국이 가장 실패했다는 장관의 말을 듣고 당황했던 마음도, 아하! 그때는 정치적 ‘전위(前衛)’의 첨단을 걷는 대통령님께서 말의 스트리킹을 보여 주셨구나, 아하! 지금은 정치적 ‘진보’의 첨단을 걷는 장관님께서 말의 배꼽춤을 추시는구나 하고 고쳐 생각해 보니….

최정호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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