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영훈]모자상봉, 천륜에 가려진 인권

  • 입력 2006년 7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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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시대의 사람들은 즐겨 천륜을 말하였다.

부자와 형제의 가족관계로서 하늘이 내었다는 뜻이다. 유학의 예서(禮書)는 천륜에는 절도(絶道)가 없다고 하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끊으려야 끊을 길이 없다는 뜻이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17세기에 유명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왕이 죽었을 때 어머니가 입을 상복의 등급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왕은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 그것이 논쟁의 핵심이었다. 임금은 사람과 귀신의 주인으로서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문난적으로 몰렸고, 그중 한 사람은 나중에 사약까지 받았다. 우리 조상들이 천륜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후 20세기 초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이러한 정치적 윤리학의 기본틀은 깨어지지 않았다. 1908년 13도 의병총대장 이인영이 망해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이끌고 서울 근교 30리에 이르렀다. 그러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하늘이 무너졌다”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람마다 자기 집 지붕만 한 하늘 조각을 이게 되면 결국 그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 주는 정치사의 한 장면이다.

최근에 그 씁쓸한 ‘천륜’이란 말을 언론을 통해 두 번이나 들었다. 28년 전 서해안에서 한 소년이 북한에 납치됐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도 한 소녀가 북한에 납치되었다. 소년과 소녀는 결혼을 해 딸을 낳았다. 이런 사실이 일본 정부의 집요한 노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덕분에 소년의 어머니와 누나가 북한에 있는 아들과 동생을 만나게 되었다. 일본 측 부모는 북한 정부가 딸이 죽었다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며 사돈댁이 북한에 가서 아들을 만나게 되면 그 통에 북한이 딸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할지 모르기 때문에 북한에 가지 말아 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어머니와 누나는 그 부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누나는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것은 천륜인데 왜 만나지 말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일본의 사돈가와 결별을 선언하고 북한으로 갔다. 천륜을 들었던 한 번이 바로 그때다. 또 다른 한 번은 모 언론사 기자가 일본 측의 태도를 비난하면서 한 말에서다. 어머니와 아들이 상봉할 권리는 “감성적으로 천륜이고 이성적으로 천부인권이다”라고 하였던가.

이 기묘한 논리는 21세기 초 한국의 사회와 정치가 아직도 전통 윤리학의 굴레에 얼마나 단단히 얽매여 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근대국가는 사람마다 이고 있는 ‘천륜’이라는 조그마한 하늘을 접고 ‘인권’과 ‘자유’라는 넓고 넓은, 다른 나라에까지도 뻗쳐 있는 하늘을 함께 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천부인권은 그때 생겨난 말인데 그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신체의 자유’를 이야기할 수 있다. 납치는 언제 어디서 누가 저질렀든 끝까지 국가가 추적하고 단죄하고 원상회복하지 않으면 안 될, 천부인권을 짓밟는 범죄다. 어디 근대국가에서만 그러한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그때부터 그러했다.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법전은 14조에서 ‘다른 사람의 어린 자식을 훔친 사람은 죽음에 처해진다’라고 하였다.

조그마한 하늘의 천륜은 천부인권이 요구하는 또 하나의 미덕, 곧 타인에 대한 배려가 결여돼 있다. 그 일본 소녀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살아 있다면 어떻게 일본으로 돌아가게 할 것인지에 관한 한국인들의 관심은 그야말로 종잇장만큼이나 얇다. 그런 가운데 납북자 가족들도 이 모임과 저 단체로 분열되어 버렸다. 배려가 결여되면 당연히 그러한 사태가 생긴다.

배려는커녕 독선의 비난도 들린다. 한 국회의원은 소년의 가족에게 배려를 요구했던 일본의 부모와 단체에 대해 “극우파의 정치적 언동”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같은 동포로서 눈물로 축하한다”고 했다. 국민을 대신해서 인권을 추구하고 보호해야 할 국회의원에게 넓은 하늘과도 같은 인류 보편의 가치가 동포니 천륜이니 하는 핏줄로 상징되는 중세적 윤리학에 얼마나 심하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진저리로 실감한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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