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선 단체장 4기 D-10…물러나는 3선 시장의 참회록

  • 입력 2006년 6월 21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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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선거전 끝에 당선되면 맨 먼저 어느 읍, 어느 동에서 표가 얼마나 나왔나부터 봅니다. 표가 적게 나온 데는 괘씸한 마음에 경로당이나 마을길이 급해도 예산집행 순위에서 뒤로 미뤄 버립니다. 아무리 표에 목숨을 거는 선출직이라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데…. 늦게나마 주민들께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이달 말 퇴임하는 박팔용(59) 경북 김천시장은 15일 김천시청 집무실에서 선거에서 3차례나 당선돼 11년간 시장직을 수행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2시간여 동안 인터뷰를 한 박 시장은 “그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하자면 며칠 밤낮을 해도 모자랄 것”이라고 했다.

당장 주민들에게서 좋은 소리를 들을 만한 일을 정책의 우선순위에 두었던 일, 현실적으로 실천이 어렵지만 “힘껏 해 보겠다”며 시간 끌기를 했던 일, 다음 선거를 염두에 두고 생색내기용 정책을 집행했던 일 등….

박 시장은 자신의 치부를 솔직히 털어놓으면서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도는 정말 고칠 점이 많다”고 힘주어 말했다.

박 시장은 재임기간에 지방자치경영대상을 포함해 130여 차례 상을 받았다. 지자체에 주어지는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다시피 했다.

고속철도 김천역 유치 등으로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한나라당 공천이면 막대기만 꽂아도 된다”는 말이 나오는 경북 지역에서 두 번이나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성공적인 민선 시장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박 시장이지만 예산 문제만 나오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닌 듯했다.

“비가 많이 올 것 같은 장마철이나 태풍 때 허술한 다리를 찾아 모래공사를 하는 척하면서 밤에 굴착기로 다리 기둥을 들이받아 흔들거리게 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비로 다리가 떠내려가면 중앙에서 재해복구비가 내려오기 때문이죠. 작은 다리 하나 놓는 데 수십억 원씩 들어가니 오죽하면 그랬겠습니까. 중앙정부의 예산을 타내기 위해 별 꾀를 다 냈습니다.”

그는 2002년 태풍 루사가 김천시를 완전히 휩쓸어 가고 복구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뒤 한 지자체장 모임에 참석했다. 박 시장은 “다른 시장들이 모두 나를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우리는 그 흔한 태풍 한번 안 오네. 한번 쓸고 가야 중앙에서 돈 벼락이 떨어지는데’라고 웃지 못할 말을 하기도 했다”면서 씁쓸해했다.

박 시장이 예산을 따내려다 수모를 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인터뷰 당일에도 임기가 며칠 남지 않았지만 예산을 따내려 서울에 다녀왔다.

“예산을 받으려고 1년에 30∼40번은 서울로 올라갑니다. ‘밤낮’으로 뛰기 위해 보통 1박 2일 일정을 잡습니다. 1년에 4분의 1은 중앙에 예산 ‘앵벌이’하러 간다고 보면 됩니다. 하루는 모 부처 국장을 만나러 갔다가 의자도 없는 복도에서 1시간 가까이 기다린 적도 있지요. 도로 예산 15억 원을 따는 게 목표였는데 10분 정도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알았으니 자료를 놓고 가라’고 하더군요. ‘15만 명의 주민을 대표해서 왔는데 이럴 수 있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피해서 주변엔 말도 못하고…. 서울시같이 돈이 많은 지자체가 아니고는 중앙에서 주는 예산이 없으면 공무원 월급도 못 줍니다.”

박 시장은 지방 공무원에 대해 지녔던 생각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시장이 되기 이전에 도의회 의원을 했습니다. 그때 보니 시청 공무원들 딱 절반만 있어도 되겠다 싶더라고요. 취임 이후 5년 동안 정년퇴직 전출 등 저절로 나가는 공무원 대신 한 명도 충원 안 했더니 1300명에서 360명이 줄었습니다. 인건비와 경상경비를 합쳐 660억 원을 아꼈죠. 하지만 인력이 없어 이전보다 일 못했다는 소리는 안 들었습니다. 남은 공무원이 힘들었을 겁니다.”

선거를 안 치러본 사람이면 이해하기 어려운 단체장 나름대로의 사정도 있다고 했다.

“몇 년 전 임시직인 운전기사가 사고로 그만두게 됐는데 이 자리에 취직시켜 달라고 힘 있는 사람,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100건 정도 청탁이 들어왔습니다. 일단 일일이 다 만나줍니다. 만나주지도 않으면 ‘저 자식 당선되고 나니 건방져졌다’는 말이 금방 돕니다. 또 솔직히 민선 단체장이라면 취직 한 건에 가족 친척 친구 등 수십 표라는 유혹을 떨치기 힘들 겁니다.”

기초단체장이 말 못하는 고충 중 하나는 지역구 국회의원과의 관계. 박 시장은 “천신만고 끝에 김천시 종합운동장 예산 50억 원을 따냈더니만, 지역구 의원이 자신의 선거홍보물에 업적으로 떡 하니 올리더라”면서 “정당 소속 단체장들은 어디 가서 하소연도 제대로 못한다”고 전했다.

박 시장은 정당 공천 문제가 나오자 갑자기 목청이 높아졌다.

“현행 정당 공천제도가 말로는 ‘책임정치 구현’이라고 하지만 실제 속을 들여다보면 정당이나 지역구 의원의 ‘기득권’ 불리기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단체장들은 지역구 의원에게 완전히 매여 있습니다. 적어도 시군구만 보면 무소속 단체장들의 업적이 훨씬 좋은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새로 정당추천제가 도입된 기초의원은 말할 필요도 없죠.”

박 시장은 차기 민선시장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로 “돈 때문에 책잡히지 말라”는 것을 첫손에 꼽았다. 그는 “내가 취임하기 전에는 승진 청탁조로 공무원 돈을 먹어도 절대 ‘배탈’이 안 난다는 게 정설이었다”면서 “다음 선거 비용, 공천 헌금을 생각하면 단체장들이 이런 유혹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무원들은 눈치가 빠르기 때문에 시장이 돈 먹었다면 직감적으로 알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영(令)이 안 서고 행정이 꼬입니다.” 3선 자치단체장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박 시장의 충고다.

박 시장은 “모든 선거가 다 그렇겠지만 지자체 선거도 끝나면 후유증이 많다”면서 “한번은 상대 후보에게 줄 선 현직 국장을 핵심 보직인 총무국장에 임명했더니 선거 후유증이 많이 사라졌다”면서 “공무원 ‘손보기’를 시작하면 공무원들이 동요하고 그 피해는 주민들에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사회부 특별취재팀>

반병희 차장 bbhe24@donga.com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문권모 기자 milkemoon@donga.com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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