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50년 英극작가 버나드 쇼 사망

  • 입력 2005년 11월 2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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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기게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때가 오면 과감히 돌진한다!”

마르크시즘이 맥을 추지 못했던 영국에서 ‘피 없는 혁명, 소리 없는 전진’을 이끌었던 페이비어니즘(Fabianism·점진적 사회주의). 그 산실인 페이비언협회를 주도한 이가 극작가 버나드 쇼다. 그는 ‘극좌와 극우의 발호를 막아 영국을 내란의 위기에서 건졌다’는 협회의 좌장 격이었다.

쇼는 자신이 ‘정부 이면(裏面)의 공작’이라고 표현했던 지적(知的) 침투를 통해 정치인들에게 개혁입법의 필요성을 확신시키는 데 힘썼다. 혁명이 아닌 개혁, 아니 개혁보다는 개량, 그것도 점진적으로 절차를 밟아.

‘20세기 세계 지성의 대부’라는 작가 H G 웰스가 협회에서 탈퇴한 게 그 뜨뜻미지근한 온건론에 반발해서다.

권력을 변화시키고자 했으나 그것을 탐하지는 않았던 쇼. 이 철저한 의회주의 신봉자도 현실정치엔 어지간히 물렸는지 예의 독설을 남긴다. “민주주의는 부패한 소수가 정하던 것을 무능한 다수가 선거로 대체했다.”

쇼는 이상의 작가였으나 또한 실천의 작가였다.

“모차르트가 나의 문학적 스승”이라던 그는 음악과 미술에도 통달했다. 모든 예술의 장르를 종횡무진 넘나들던 그가 연극에 눈을 돌렸을 때 영국 사실주의 근대극은 탄생한다.

그는 입센의 참여문학을 전범으로 삼았다. 대도시 빈민가의 주택문제와 조직매춘 같은 ‘불쾌한 주제’를 다루며 사회성 짙은 메시지를 담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허위와 위선에 찌든 연극 무대를 일신(一新)했다.

몽상가이자 신비주의자였던 쇼. 그의 예술은 도덕적 열정에 이끌렸으나 실제 생활에선 오만불손하고 자기 과시적이었다. 94세가 될 때까지 오래도록 살아남아 다른 사람을 개의치 않는 쾌활한 기지를 마음껏 내뿜었다.

깡마른 체구와 무성한 턱수염, 멋진 지팡이는 그의 희곡만큼이나 유명세를 탔다.

쇼는 매사에 신랄했다. 1925년 노벨문학상을 받고는 이렇게 내뱉었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세계문학상을 생각해낸 건 참으로 언어도단이야….”

어떤 이는 그를 “사회주의의 선전가”로 혹평하기도 하나 그의 문제작은 아직도 연극적 생명을 잃지 않고 있다.

임종을 앞두고 의사에게 “당신은 마치 골동품처럼 나의 생명을 보존하려 든다”고 투덜거렸던 쇼. 그는 이런 묘비명을 부탁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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