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95>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5년 10월 25일 03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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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섣달의 눈보라가 온 천지를 꽁꽁 얼어붙게 했다. 광무산의 두 봉우리 위에 세워진 한군(漢軍)과 초군(楚軍)의 진채도 더했다. 마주 보고 퍼붓던 욕설도 끊기고 두 진채 모두 매서운 눈보라 속에 납작 엎드리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광무간(廣武澗)이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마주 보고 있는 두 봉우리 중에 먼저 자리를 잡고 진채를 얽기 시작한 것은 한군이었다. 오창과 이어진 서(西)광무에 자리 잡은 한군은 엄청난 물력(物力)을 들여 그 봉우리를 순식간에 든든한 요새로 만들어 놓았다. 패왕이 이끄는 초나라 군사들의 사나움과 날램을 몇 번이고 뼈저리게 맛본 뒤라서 그런지 튼튼하면서도 빈틈없는 야전축성(野戰築城)이었다.

서광무의 동쪽은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되어 있고, 벼랑 아래는 변수((변,판)水)란 개울물이 흘렀다. 그리고 백 걸음 저쪽에는 동(東)광무가 솟아 있는데, 그 역시 서광무와 마주 보는 면은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었다. 이에 한군은 서광무의 동쪽을 빼고는 세 면 모두 녹각(鹿角)과 목책(木柵)을 겹겹이 세우고, 필요한 곳에는 다시 바위로 성곽까지 쌓아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일을 마치고 보니 어지간한 산성(山城)보다 더 든든했는데, 실제로도 뒷날 그곳 사람들은 그런 한군의 진채 터를 한성(漢城)이라 불렀다.

패왕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 군사들이 서광무의 한군 진채로 몰려든 것은 그 모든 채비가 끝난 사흘 뒤였다. 먼저 광무간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본 패왕은 서광무의 서쪽 경사면으로 대군을 몰았다. 하지만 계포가 걱정한 대로, 그쪽 비탈은 가파르지 않은 만큼이나 한군 쪽의 대비가 잘되어 있었다. 촘촘한 녹각과 목책이 앞을 막고, 어렵게 그것들을 타 넘으면 다시 돌로 쌓은 성곽이 솟아 있는 식이었다. 원래 그 봉우리 발치에 있던 산성과 혈창(穴倉) 주변에 둘러 있는 누벽(壘壁)도 봉우리 위의 진채를 지키는 데는 한몫을 단단히 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초나라 군사들을 괴롭힌 것은 싸우기에 너무도 불리한 지형이었다. 서쪽 비탈이 가파르지 않다고 하지만 깎아지른 듯한 절벽인 동쪽 면보다 낫다는 뜻이지, 결코 힘들지 않고 밀고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래에서 쳐 올라가는 초나라 군사들은 창칼만 끌고 가기에도 숨이 차는데, 위에서 막고 있는 한나라 군사들은 들고 있던 통나무만 슬그머니 내려놓아도 그대로 무시무시한 병기가 되어 비탈을 기어오르는 초나라 군사들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패왕은 사흘이나 더 군사들을 서광무 꼭대기로 몰아대다가 죽고 다치는 군사들이 늘어가자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물렸다. 한군이 굴려 대는 바위나 통나무가 닿지 않을 평지에 잠시 진채를 내리게 한 패왕이 오랜만에 장수들을 군막으로 불러 모았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금세 터질 듯한 얼굴로 패왕이 여러 장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좀체 남에게 묻는 법이 없던 패왕이라 장수들이 놀랍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며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래도 아직 패왕에게 제 속을 털어놓는 몇 안 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용저가 받았다.

“아무래도 계포 선생이 말한 대로 우리 또한 동광무에 진채를 얽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거기서 광무간을 사이에 두고 적을 내려다보면서 변화를 기다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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