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국정원 고백 뜯어보기

  • 입력 2005년 8월 12일 03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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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의 도청 고백에서 뭔가를 이루기 위한 정치적 음모나 사전 정지(整地)작업의 느낌을 받는다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정치판을 뒤흔들 수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에 연이어 나왔기에 더욱 그렇게 느낄 수 있다.

국정원이 기자회견을 통해 과거를 실토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큰 얘기가 나올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아니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막말로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의 X파일과 비밀도청팀(미림팀) 사건만 속 시원히 발표했어도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국정원의 고백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것 외에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샀고 지금도 정치권의 공방거리가 되고 있는 건 그래서다. 물론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 결단코 아무런 정치적 의도나 음모가 없으며 우연히 진실이 터져 나왔고 그것을 덮을 수 없어 공개한 것뿐이라고 밝혔으니 믿는 게 옳을 게다.

하지만 정치적 의도나 음모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국정원 개혁은 염두에 둔 고백이었다고 보는 것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노 대통령 자신이 평소 국정원의 조직과 역할 정비에 관심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김승규 국정원장도 고백 이유를 밝히면서 그런 뉘앙스를 풍겼다.

대통령이 마음먹기에 달렸지 국정원 개혁이 뭐가 그리 어려운 거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의 국정원처럼 국내정보와 해외정보, 통신감청을 한곳에서 맡고 있는 초거대 정보기관은 지구상에 그리 많지 않다. 정보 독점이 크다 보니 그만큼 파워도 셀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수십 년 동안 거대한 공룡조직으로 키워진 국정원을 하루아침에 손댈 수는 없을 것”이라고 공언한다. 심지어 “수만 명의 잠재적 공운영(미림팀장)이 있는 국정원을 손보려 하다가는 오히려 손보려는 쪽이 다치기 쉽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안기부의 X파일 사건과 도청 고백으로 국정원의 위신이 크게 추락해 이젠 손질이 불가피한 쪽으로 대세가 기울고 있다. 굳이 대통령과 국정원장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이미 정치권에서 조직과 역할, 예산까지 손보려는 구체적 움직임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한나라당은 가칭 ‘국정원 개편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심지어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은 국정원의 국내정보 분야를 떼어 내고 해외정보처로 개편하는 내용의 가칭 정보개혁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결국 국정원의 과거 고백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개혁을 위한 정지작업 역할은 충실히 한 셈이다. 스스로 초래한 일이니 지금 와서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개혁도 좋지만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우는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좋은 의미의 국가 정보력은 우리의 귀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또 이왕 개혁하려면 겉모양에만 신경 쓸 게 아니다. 좀 더 근본적으로 바꿔 유한한 특정 정권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무한한 국가에 충성하는 정보기관으로 거듭나도록 해야 한다.

이진녕 정치부장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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