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95>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28일 03시 10분


코멘트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그런데 형양성 안이라고 모두 기신이나 주가 같은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양도(糧道)가 끊긴 채 에워싸인 지 오래되는 바람에 굶주리고 지친데다, 그 며칠 패왕의 위세에 겁을 먹어 밤중에 몰래 성벽을 넘어 도망쳐 나오는 한나라 군사들도 더러 있었다. 패왕이 그들 중에서 기신과 주가를 잘 아는 자들을 찾아오게 해 물었다.

“며칠 전에 불타 죽은 기신이라는 자는 한왕으로 꾸며 나를 속이기 전에는 무엇을 하였느냐? 한왕이 그에게 어떤 벼슬을 내리고 어떤 대접을 하였느냐?”

“기신은 풍패(豊沛)에서부터 막빈(幕賓)으로 한왕을 따라나선 사람입니다. 일찍이 칠대부(七大夫)에 올랐으나 이름뿐이었고, 지금까지는 대개 이졸들 사이에 묻혀 싸워 왔습니다.”

그 말을 듣자 패왕도 뭔가를 조금 알 만하다는 눈길이 되어 말했다.

“그렇다면 한왕 유방은 그런 기신을 갑자기 대장군으로 올려 세우면서 자기를 대신해 죽어주기를 당부한 것이로구나.”

“그건 아닙니다. 듣기로 한왕처럼 꾸미고 항복할 꾀를 먼저 낸 것은 오히려 기신이었다고 합니다. 한왕이 기신을 대장군에 가임(假任)한 것은 그저 항복하는 모양새를 제대로 갖춰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말에 패왕은 다시 알 수 없다는 기분이 되었다.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주가는 어떠했느냐?”

“벼슬은 진작부터 어사대부(御使大夫)였지만 그 또한 싸움터를 떠도는 한왕의 진중에서는 그리 대단할 게 없었습니다. 게다가 한왕은 주가가 유자(儒者)라 하여 수하등과 더불어 자주 놀리고 욕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왕이 벼슬이나 재물로 주가와 기신의 마음을 산 것도 아니었다.

‘무엇일까. 한왕은 무엇을 주고 저들의 목숨을 산 것일까.’

항복해 온 군사들을 내 보낸 뒤 패왕은 다시 한동안이나 더 생각에 잠겼으나 끝내 그게 무엇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다만 그때부터는 까닭 모를 분노와 모욕감 대신 어떤 섬뜩함으로 유방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처지를 바꾸어 내가 유방처럼 된다면 기신처럼 나서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살이 불에 타는데도 뜻을 바꾸지 않고 웃으며 나를 위해 죽어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하지만 어쨌든 형양성은 오래 끌지 않고 떨어뜨려야 할 성이었다. 며칠 뒤 패왕은 다시 장졸들에게 형양성을 칠 채비를 하게 했다. 그런데 그날 한낮이었다. 갑자기 성문이 열리더니 성 안에서 수천 명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초나라 군사들이 급히 마주쳐 나가 보니 이번에 나온 사람들은 늙은이와 아이들이었다.

성난 패왕은 그날을 넘기지 않고 대군을 몰아 형양성을 쳤다. 패왕이 몸소 통나무를 메고 흙 자루를 져 나르며 앞장서 싸웠으나 주가와 종공은 군민을 이끌고 한 번 더 성을 지켜냈다. 지난번에 여자들을 모두 내보내고 그날 다시 늙은이와 아이들을 내보내 군살을 던 때문인지 성안의 전력은 며칠 전보다 오히려 정비되어 있는 듯했다.

기신과 주가 모두 유자였지만, 기신은 그 이념을 한순간에 처절하게 꽃피우고 져 간 데 비해, 주가는 그 이념으로 살아남아 한나라의 방패로서 제 몫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