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79>卷六. 동트기 전

입력 2005-06-09 03:05수정 2009-10-09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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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장군들의 말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소. 장수를 보내고 불러들이는 것은 군왕(君王)의 당연한 권한인데, 대왕께서 주은(周殷)을 구강으로 보내고 항백(項伯)을 불러들인 게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거요?”

아직도 종리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범증이 그렇게 되묻자 이번에는 용저가 나서서 물음을 받았다.

“대왕께서 주은을 구강으로 보내고 항백 장군을 부르신 것은 종성(宗姓)이나 처족(妻族)이 아니면 믿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은이 한왕과 내통할까 걱정하여 멀리 구강으로 보내고 종성인 항(項)장군을 곁으로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아니, 용 사마(司馬) 그 무슨 말씀이오? 아무리 하면 대왕께서 그러실 리가 있소?”

범증이 놀라 펄쩍 뛰듯 하며 용저를 보고 그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다시 종리매가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범증의 말을 받았다.

“아부(亞父)께서는 대왕과 한몸처럼 가까이 계시면서도 아직 그걸 모르십니까? 지금 대왕께서는 주은만 의심하고 계신 게 아닙니다. 항씨(項氏)나 처족이 아니면 아무도 믿을 수 없으신지, 며칠 전부터는 우리들에게도 사람을 붙여 손 한번 내젓고 발걸음 한번 내딛는 것까지 살피게 하고 계십니다.”

“손발만 묶이지 않았을 뿐이지 저희들은 이미 갇혀 있는 바나 다름없습니다. 대왕을 따라나서 목숨을 건 싸움만도 수십 전(戰)을 겪은 저희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대왕의 의심이 두렵기보다는 욕스러워 견딜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맞장구를 치는 용저의 눈에는 죽음을 겁내지 않고 전장을 내달리던 맹장답지 않게 눈물까지 비쳤다. 그런 용저와 종리매를 보자 범증도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 며칠 패왕에게서 받은 어떤 석연찮은 느낌이 불현듯 훤하게 깨달아지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 늙은이도 의심받고 있다는 것이오? 대왕께서 이 늙은이의 말을 따르지 않고 형양성을 에워싸고만 계신 것도 바로 이 늙은이를 믿지 못해서란 말이오?”

범증이 치솟는 화를 다스리지 못해 수염까지 푸르르 떨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그렇게 소리쳤다. 종리매가 어둡고 무거운 목소리로 그런 범증의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대왕께서는 이미 이틀 전에 아부에게서 병권(兵權)을 거두셨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앞으로는 대왕의 명이 없으면 누구도 군사 한 명 말 한 필 움직일 수 없다 하시고, 특히 아부를 지목하여 그 명을 받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범증은 종리매와 용저가 듣고 있다는 것도 잊은 듯 큰소리로 외쳤다.

“이 더벅머리 아이(수자·수子)가 실로 너무하는구나. 아무리 군왕이기로서니 내게 이럴 수 있는 것이냐!”

그리고는 늙은 두 눈으로 줄줄이 눈물을 흘렸다. 종리매와 용저도 처연한 얼굴로 함께 탄식해 마지않았다.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은 범증이 주름진 볼을 적시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며 말했다.

“내 늙은 몸을 이끌고 너무 오래 권세를 뒤좇다가 오늘 이 욕을 보는구나. 늦었지만 이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 삭아가는 해골이라도 욕을 면하게 해줌이 옳으리라!”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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