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속의오늘]1848년 화가 고갱 출생

  • 입력 2005년 6월 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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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화 속에서 존재하기 위해, 문명의 손길로부터 나 자신을 자유롭게 지키기 위해 타히티로 떠난다.”

1891년 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1848∼1903)은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로 향하는 해군 함정에 몸을 실었다. 작열하는 태양, 드넓은 쪽빛 바다, 물결 위로 부서져 내리는 은빛 햇살…. 타히티는 원시적 생명력이 출렁거리는 곳이었다.

고갱과 타히티의 만남은 위대했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는 고갱을 만남으로써 예술적 상상력의 공간으로 부각됐고, 고갱은 타히티에서 그의 강렬한 미술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 무렵 파리는 정치적 혼란 상태였다. 언론인이었던 고갱의 아버지는 정치적인 이유로 실직했고, 고갱은 아버지를 따라 페루에서 6년간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17세에 선원이, 20세에 해군이 되었다. 망명 생활의 어두운 그늘은 태양에 대한 갈망을 키웠다. 선원과 해군 생활 7년 동안 바다의 장엄함과 생명력을 배우고 이국에 대한 동경을 키워 나갔다. 고갱의 청년기는 바다와 태양에서 유리될 수 없는 시기였던 셈이다. 그의 타히티행도 이 같은 체험에 힘입은 것이었다.

1883년 35세 때 그는 전업 작가의 길로 뛰어들었다. 얼마 후 빈센트 반 고흐와의 만남이 시작되고 프랑스 남부의 아를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고흐와 고갱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1888년 12월 어느 날, 고흐는 고갱과 다툰 뒤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잘라 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결별했다. 파리로 돌아온 고갱의 삶은 곤궁의 연속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혼란 속에서 문명에 대한 혐오감은 커져만 갔다. 그 혐오가 커지면 커질수록 태양과 바다, 그림에 대한 열망도 더욱 커졌다. 1891년 고갱은 드디어 모든 것을 버리고 타히티행 배에 홀로 올랐다.

고갱의 타히티행에 대한 비판도 있다. 타히티에 간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유럽인 우월주의의 발로라는 지적이다. 사실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타히티에서 인류 미술사에 길이 남는 걸작들을 창조해 냈다는 사실이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왜 나는 태양이 만들어 낸 장관을 캔버스에 그리는 걸 주저했을까’ 하고 반성했다. 고갱 그림의 생명력은 태양의 세례 덕분이었다. 그건 분명 타히티의 힘이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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