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55>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1월 11일 1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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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초나라 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몰려들 때 어머니가 갑자기 저희들 둘을 수레에서 끌어내리시더니 등짝을 두드려 가까운 밀밭으로 쫓으시며 당부했어요. 무슨 소리가 나도 저 밭고랑에 꼼짝 말고 엎드려 있으라고요. 그러다가 사방이 조용해지거든 밀밭에서 나와 서쪽으로 아버지를 찾아 가라고 하셨어요.”

맏 공주의 그 같은 말에 한왕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곁에서 듣고 있던 하후영이 불쑥 한마디 했다.

“역시 대단한 분이십니다. 누가 우리 여후(呂后)님의 깊은 헤아림을 따르겠습니까?”

“그런데 심이기는 왜 중양리(中陽里)에 있지 않고 모두 이리로 데리고 왔을까?”

한왕이 하후영의 말을 받는 대신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마도 무슨 헛소문을 들었겠지요. 대왕께서 아직 팽성에 계신 줄 알고 그리로 가려한 듯합니다.”

“그럼 여기까지 온 초나라 군사는 어찌된 것일까?”

“범증의 짓일 겝니다. 대왕께서 추격을 벗어났다는 말을 듣자 태공(太公) 내외분과 가솔들이라도 인질로 쓰려고 발 빠른 기병들을 보냈을 겁니다.”

큰 쪽박이 깨지면 작은 쪽박이 큰 쪽박 노릇 한다던가, 머리 써 줄 사람이 아무도 한왕 곁에 남지 않게 되자 하후영이 제법 분별 있게 일의 앞뒤를 헤아렸다. 그런 하후영을 대단한 막빈이라도 만난 듯 한왕이 다시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런데 이번에도 하후영은 한왕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하읍(下邑)에 있는 주여후(周呂侯)를 찾아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에게 군사 1만 여 명이 있으니 우선 대왕을 호위할 만합니다.”

주여후는 여후(呂后)의 오빠 여택(呂澤)을 가리킨다. 한왕이 팽성에 들어갈 때 군사 1만여 명을 갈라 주며 하읍을 지키게 한 적이 있었는데 아직까지 초나라 군사에게 성이 떨어졌다는 소문은 없었다. 한왕이 보아도 그때로서는 주여후를 찾아가는 길밖에 없었다.

“하읍에만 가면 망산과 탕산이 멀지 않아 과인의 생각에도 무슨 수가 날 듯하다. 하지만 여기서 서남쪽으로 가야 하니 혹시라도 초나라의 대군을 만날까 걱정이다.”

“패왕은 태공 내외분과 대왕의 가솔을 인질로 잡아 조금 느긋해져 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하읍까지는 수레로 달려가면 한나절 길도 되지 않습니다. 먼저 날랜 말을 보내 주여후로 하여금 대왕을 마중 나오게 한다면 탈 없이 하읍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한왕은 그대로 따랐다. 가장 빠른 말을 탄 군사 하나를 뽑아 먼저 하읍으로 보내고 남은 삶들도 그리로 길을 잡았다. 하지만 범증은 하후영이 헤아린 것처럼 그리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었다. 태공 내외와 여후를 사로잡았다는 기별을 받고도 마음을 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유방을 잡아 죽여야 합니다. 저 홍문(鴻門)에서처럼 또다시 유방을 달아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거듭된 승리에 취해 가는 패왕을 그렇게 다그쳐 사방으로 추격대를 풀었다. 그 추격대 중에 한 갈래가 다시 한왕 일행을 따라 잡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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