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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1월 9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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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적인 이유 때문인지 총리직은 다른 어느 관직보다 '입때'가 많이 묻었다. 의전총리 대독총리 방탄총리 들러리총리 그림자총리 얼굴마담총리 등과 같은 숱한 별칭에 흔적이 남아 있다. 심지어 수석장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총리직은 감투만 컸지 실제 권한과 역할은 미미해, 한때 무용론이 나돌기도 했다.
▼진실성도 진지함도 결여된 ‘謝意’▼
그런 자리이기에 우리 헌정사에서 총리란 뒤치다꺼리 전문으로 각인됐다. 대통령이 문제를 일으켜도 국회에 나가 번번이 매를 맞는 건 총리였다. 정책이 실패하고 나라살림이 엉망이 되도 그랬고, 뜻밖의 대형사고가 터지고 자연재해가 닥쳐도 그랬다. 매 맞는 것도 부족하면 하릴없이 자리에서 밀려나야 했다.
따라서 총리가 국회 본회의에서 대놓고 야당에게 호통을 치는 경우란 상상하기 힘들었다. 드물게 실세총리로 불린 이도 있었지만, 그도 의사당에서만은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 했다. 정부가 지금보다 훨씬 센 힘을 갖고 있었고, 거대여당이 뒤에 버티고 있었던 권위주의 시절에도 총리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야당에 대한 총리의 의사당폭언 때문에 의사일정이 2주 가까이 중단된 것은 초유의 사태다. 총리 스스로 정쟁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사례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이해찬 총리는 또 하나 기록을 세운 셈이다. 총대총리라는 별칭도 하나 더 만들어냈다. 대통령의 부담을 덜기 위해 매를 자청했다는 의미에서다.
이 총리의 사과를 둘러싸고 여야가 꽤 오래 줄다리기를 했으나, 9일 나온 그의 성명은 일반적인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첫머리에 국회의장의 권고와 여당의원들의 요청을 언급한 것부터가 마지못해 '사의(謝意)'를 표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거기에서 진실성은 물론 진지함도 엿볼 수 없었다.
자신의 막말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야당과 언론을 향해 더욱 심한 막말을 쏟아낸 그에게 애당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기대한 것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여권 일각에서 '이해찬 대망론'까지 솔솔 나오는 요즘 다소 들떠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거침없는 언행도 그 같은 기대를 접게 한다.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그 성명에 총리 임면권자인 대통령의 의중도 실려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야 대치와 국회 공전의 불씨를 지핀 이 총리에게 보란 듯이 2주 연속 국무회의를 주재토록 한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대통령은 그동안 결코 침묵한 게 아니었다. 행동으로 이 총리를 거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겉말과 속뜻이 다른 '교언(巧言)'은 이 총리 체질에 맞지 않는다. 그를 접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낯빛이나 손움직임만 보고도 그의 말뜻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다면 감사와 사과의 뜻을 동시에 지니는 사의라는 애매한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진의를 감추려 든 성명엔 다른 곡절이 있을 것이다.
▼이해찬답지도 총리답지도 않다▼
그거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김대중 정부 초기 김종필 총리 인준을 위해 발 벗고 나선 그였다. 한 모임에서 JP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총리님, 고맙습니다"며 깍듯이 절하던 그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총리 인준 직후 신임인사 차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찾아가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이 총리도 필요할 경우 몸을 굽히곤 했다. 단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데 인색했을 뿐이다. 이번 성명도 정치적 필요에 따른 임기응변식 굴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통령이 내세우고 있는 책임총리와 거리가 멀다. 독일과 국회에서 얼굴을 붉히던 그답지도 않다.
임채청 편집국 부국장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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