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속의 오늘]1937년 윈저공, 심슨 부인과 결혼

  • 입력 2004년 6월 2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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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해 왕관을 버렸다는 영국 왕 에드워드 8세.

스스로 ‘공(公)’이 되었던 짐(朕)과 이혼녀 월리스 심슨 부인의 얘기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허나, 이 ‘세기의 로맨스’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었으니.

하나는 전설이 되었고, 또 하나는 비화(秘話)가 되었다.

매혹적인 ‘가을의 전설’은 1930년 9월 시작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심슨 부인의 눈은 열정으로 타올랐다. 일찍이 어느 누구도 그런 눈으로 ‘전하’를 빤히 쳐다본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 사람도 없었다. “전하의 바지는 신발과 어울리지 않는군요.”

첫눈에 반한 그는 1933년 6월 함께 스키여행을 다녀온 뒤 청혼한다.

세기의 로맨스가 무르익어가던 1936년 1월. 아버지 조지 5세가 사망하자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소!”

심슨 부인은 ‘세 번째’ 결혼을 위해 두 번째 남편과의 예비 이혼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국교회와 정부의 반대는 완강했다. 스탠리 볼드윈 총리는 “이혼녀와의 결혼은 군주제의 고결함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경고했다.

그 이듬해 그들이 프랑스에서 결혼했을 때 영국 왕실은 아무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얘기.

출처는 미국 연방수사국(FBI) 비밀문서다.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포기할 당시 심슨 부인은 주영독일대사와 ‘뜨거운’ 관계였다. 나치 독일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녀는 영국의 비밀정보를 흘렸다.

독일대사는 그녀에게 매일 17송이의 카네이션을 보냈는데, ‘17’은 그들이 동침(同寢)한 횟수다.

볼드윈 총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 8세에게는 양위(讓位) 이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한 뒤 프랑스와 바하마에 머물러야 했는데, 그것은 사실상 ‘유배’였다.

‘윈저공’은 사랑을 얻었으나 상심했다. 그러나 심슨 부인은 보석을 사랑했고 활기에 넘쳤다. “사람은 부유할수록 좋고, 몸매는 날씬할수록 좋다!”

파리에서 사는 동안 하인 18명의 시중을 받으며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한다.

다만 이따금씩 푸념했다. “세기의 로맨스? 그거 얼마나 죽을 맛인데….”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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