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나의 이복형제들’…잡초같은 생명력

  • 입력 2004년 5월 28일 17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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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명랑씨. 신작 ‘나의 이복형제들’은 “진짜로 살아있는 것, 길들여지지 않고 자연 그대로인 것”으로 살아가려는 소녀 이영원의 삶을 그렸다. 이영원은 힘없는 이웃들의 구원을 통해 이 같은 소원을 이뤄 나가려고 한다.김경제기자 kjk5873@donga.com
작가 이명랑씨. 신작 ‘나의 이복형제들’은 “진짜로 살아있는 것, 길들여지지 않고 자연 그대로인 것”으로 살아가려는 소녀 이영원의 삶을 그렸다. 이영원은 힘없는 이웃들의 구원을 통해 이 같은 소원을 이뤄 나가려고 한다.김경제기자 kjk5873@donga.com
◇나의 이복형제들/이명랑 지음/300쪽 9000원 실천문학사

작가 이명랑(31)의 신작 장편 ‘나의 이복형제들’을 읽다 보면 하얀 티 하나 떠있지 않은, 잉크 방울 같은 열일곱 살의 검은 눈동자가 떠오른다. 검어서 청명한 눈망울, 바로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열일곱 살 소녀 이영원의 생명이 시작되는 곳이다.

물 위의 낙엽처럼 흘러 다니던 그녀가 ‘협동합시다 아저씨’의 손길에 이끌려 잠시 머물고 있는 곳은 서울 영등포시장의 과일가게인 서울상회다. 작가 자신이 자랐고, 과일을 팔았고, 글을 썼고, 자신의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시장 한쪽의 작은 가게다.

이씨는 2년 전 내놓은 소설 ‘삼오식당’에서 흥정과 활기 속에 살아가는 이곳 억척 상인들의 열전(列傳)을 그렸다. 이번에는 그 시장판에서 난무하는 멸시와 폭력에 하염없이 노출된 나약한 부초들이 이씨의 펜을 통해 생명을 얻는다.

근육마비 증세로 병원 출입을 밥 먹듯 하는 춘미, 불법체류 인도인 노무자 ‘깜뎅이’, 기둥서방의 뭇매를 맞아가면서도 주민등록증을 얻기 위해 몸을 팔아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조선족 출신 다방 종업원 ‘머저리’, 키가 여섯 살배기만 한 ‘난쟁이 왕눈이’, 그리고 이 모든 이들과 상처를 비비고 마음을 섞는 ‘나, 이영원’이다.

장미다방 종업원 ‘머저리’는 과일상자에 쓰인 글을 읽으며 한글을 익힌다. 그런 그녀가 돈을 좀 모을라 치면 어김없이 기둥서방이 나타나 마지막 남은 1000원권 한 장마저 뺏어간다. 영원은 그녀에게 국어 교과서를 구해 주고 통장을 만들어 준다.

몸이 굳은 춘미가 더 이상 텔레비전 리모컨을 누를 수 없게 되자 영원은 그녀의 손가락이 되어 준다.

왜소한 몸에 대한 열등감으로 마음이 비뚤어진 왕눈이가 진돗개를 앞세워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자 영원은 맨가슴을 왕눈이 앞에 들이대며 결국 그를 굴복시킨다.

이 부초 인생들을 수면 위에 띄우고 달려 나가는 작가의 필력은 개울물처럼 유연하고, 여울물처럼 날렵하며, 폭포처럼 쾌활하다. 시장 사람들의 능청스러운 기지와 유쾌한 간계가 사과상자 안에 놓인 홍옥처럼, 생선가게 널위에 얹힌 갈치처럼 빛난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허물을 벗겨 자유를 부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대상은 두 명, 곧 몸속의 열불 때문에 밤마다 남의 가게 냉장고를 열어 몸을 식히는 소설가 지망생 덕진과 ‘나, 영원’이다.

이들의 현실은 영원이 살고 있는 지하실에서 푸드덕거리는 까치 한 마리로 상징된다.

인도인 노무자 ‘깜뎅이’가 그 검은 새를 마침내 창공에 던져 주는 모습은 늘 카메라를 목에 매달고 다니는 영원의 눈에 더없이 강렬하게 포착된다.

‘지하실로 빛이 스며들었다. 내 눈에는 계단 정면에 있는 까치에게만 빛이 모여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자수정처럼 까치의 까만 눈이 빛을 빨아들였다. 어둠 한가운데 길처럼 나 있는 빛을 향해 까치가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 두근거리는 장면은 영원의 귓전에 생생한 아버지의 마지막 충고와 짝을 이룬다. 영원은 무당의 딸이었다.

억센 어머니가 영원을 접신(接神)시키기 직전 나약한 아버지가 나타나 굿판을 난장판으로 만듦으로써 영원은 강제된 운명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딸이 ‘신들린’ 몸으로 살아가는 것을 거부한 아버지는 남은 기력을 다해 영원에게 마지막 호흡을 불어넣으며 이렇게 말한다.

“영원히, 멀리, 도망…가라.”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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