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서봉수 9단 “아직은 누구든 이길 것 같은데…”

  • 입력 2004년 5월 23일 17시 31분


서봉수 9단은 어린이들이 쉽게 바둑을 배울 수 있게 7줄짜리 바둑판을 만들어 보급할 계획도 갖고 있다. 군포=서정보기자
서봉수 9단은 어린이들이 쉽게 바둑을 배울 수 있게 7줄짜리 바둑판을 만들어 보급할 계획도 갖고 있다. 군포=서정보기자
“흑이 이렇게 두면 단수죠. 백은 한 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어떻게 둬야 하나요.”

20일 오후 경기 군포시 당정동 ‘서봉수 바둑도장’. 서봉수 9단은 바둑을 처음 배우는 어린이 6명에게 강의를 하고 있었다.

제2회 잉창치배 우승, 국수전 2년 연속 제패 등 국내외 기전에서 27차례나 우승했던 서 9단이 초급반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게 의아했다. 강의가 끝난 뒤 서 9단과 마주했다.

“17일 문을 열었어요. 수강 어린이들이 10여명 돼요. 초보를 가르치려니 조금 갑갑하긴 하죠. 하지만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보다 재미있다’고 하니 힘이 나네요.”

1980년대 자웅을 겨뤘던 조훈현 9단이 아직 건재한데 반해 서 9단이 호구지책으로 바둑 강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왕년의 팬들에겐 씁쓸하기만 하다.

그는 지난 2년 반 동안 골프에 빠졌다.

“세상에 바둑보다 더 재미있는 게 있는 줄 몰랐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당연히 바둑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성적은 24승 24패로 입단 이후 최악이었다. 만 45세 이상만 참가하는 돌씨앗배에서 우승했지만 그 이후 추락을 거듭해 올해엔 한국바둑리그 외엔 본선에 진출한 기전이 없다.

53년생이니 쉰한 살. 아직 승부를 포기할 나이는 아닌 것 같다고 묻자 “이젠 바둑에 금이 가서…”라며 말끝을 흐린다.

그러나 예전에 ‘금이 갔다’는 말을 들을 때도 그는 여러 차례 화려하게 부활하며 바둑계를 놀라게 했다.

90년대 중반 조훈현-이창호 시대가 전개되면서 뒷전으로 밀린 그에게 정상 정복이 힘들 것이라는 말들이 오갔다. 그러나 97년 국가별 단체전인 진로배 연승바둑 최강전에서 그는 믿기지 않는 ‘나홀로 9연승’을 거두며 한국팀에 우승컵을 선사했다.

그리곤 또다시 부진. 이제는 정말 끝났다는 말이 나왔던 99년, 그는 LG정유배에서 유창혁 9단을 3 대 2로 누르고 우승했다. 2000년 왕위전에서 32연승 등 기세를 올리던 이세돌 9단(당시 3단)을 꺾고 도전권을 따낸 것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잊혀질 만하면 화려하게 복귀했다.

“열심히 공부하면 되죠. 일정한 경지에 있기 때문에 관심을 기울이면 실력이 금방 늡니다. 올해 초에 한 달간 허장회 8단 바둑도장에서 한국기원 연구생들과 어울리며 바둑을 뒀는데 실력이 느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최근 한국바둑리그 본선에 올랐다. 8개 팀이 32명 기사들을 두고 지명할 때 그는 28번째에 뽑혔다. 앞서 선발된 이들은 대부분 후배들이다.

“프로의 세계에서 성적이 좋지 않으면 당연한 거죠. 기분 나쁜 건 없어요. 내가 선발권이 있어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가 세상을 대하는 시각도 현실적이다. ‘오늘은 져도 내일은 이기면 된다’는 것. 그래서 그는 오늘의 푸대접에 서글퍼할 필요가 없으며 내일 좋은 성적을 내면 대접이 달라질 것이라고 한다.

저녁을 먹으며 술 한 잔이 들어가자 그도 속내의 일단을 내보인다.

“아직은 누구에게도 질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아요. 마음만 먹으면 50대 중반까지 승부해 볼 체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나이를 먹으면 마음먹기가 쉽지 않다는 게 문제죠.”

“그래도 속기전처럼 체력을 덜 쏟는 기전이면 해볼 만하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서봉수의 화려한 복귀가 궁금해졌다. 그는 이달 말 한국바둑리그 첫 대국으로 보해팀의 백홍석 2단과 맞붙는다.

군포=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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