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도 한도 없이 징검다리를 밟고 싶다면 전남 신안군 암태도로 가 볼 일이다. 거기서 썰물 때를 기다리자. 하루 두 번 바닷길이 열리면 징검다리가 착한 거북처럼 그 등짝을 드러내 사람들이 건너편 추포도로 건너갈 수 있게 해준다. 누가 세었을까. 족히 6000여개의 다듬지 않은 돌들이 다리를 이루고 있다. 두 섬의 사람들이 이 다리를 밟으며 가고 온 것도 줄잡아 350여년이라 한다.
사진작가로 20여년째 한국의 옛 다리를 찍어온 저자가 조선조 궁궐 다리의 금메달감으로 꼽히는 창경궁 옥천교로부터 이름 없는 백성들이 지었지만 천년 세월에도 의연히 버티고 있는 충북 진천의 농다리까지 44개의 아름다운 옛 다리와 그 다리에 얽힌 사연, 주변 풍광을 사진과 글로 소개했다.
책 뒤쪽에는 가나다순의 다리 이름과 소재지, 문화재 지정 분류체계에 따라 책에 수록된 다리를 찾는 색인이 튼실하게 실려 있다. 그러나 앞에서 뒤로 읽는 방식이나 색인을 뒤적이며 읽는 것보다는 어느 쪽이든지 책을 펼쳐 다리 사진에 먼저 취한 뒤 글을 읽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사진을 찬찬히 살피다보면 다리도 다리지만 다리와 어우러진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저자는 ‘그 다리의 1년 중 가장 좋은 한때’를 렌즈에 담기 위해 애썼다. 전남 곡성군 동리산 계곡의 고찰(古刹) 태안사의 능파각(凌波閣) 다리는 늦가을 낙엽이 계곡을 타고 흘러내릴 때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 11월의 해가 넘어가기 전 그 짧게 빛나는 시간의 다리 모습을 렌즈에 담기 위해 서두르다가 저자는 바위에 부딪혀 손가락뼈를 다치기도 했다. 전남 장성군 백양사의 징검다리는 초여름 녹음이 물에 비쳐 다리 건너는 사람의 넋을 놓게 하는 5월의 모습으로 담겼다.
경북 봉화군 닭실마을에 있는 조선 중종 때의 문신 권벌(1478∼1548)의 종가에 놓인 돌다리는 조선조 사대부 살림살이의 기품을 보여준다. 다리와 함께 나리꽃, 철쭉, 소나무, 향나무가 어우러진 기품 있는 한국 정원을 지금도 종손들이 잘 보존하고 있는 이 집에 들르면 문중 부녀자들이 500년간 전해 내려온 방식으로 만드는 한과를 맛볼 수도 있다. 다리는 이처럼 마을과 마을만 잇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기도 한다.
다리는 감상하는 조각품이 아니다. 건네주고 이어줄 때 그 덕성이 온전히 드러난다. 다리의 아름다움에 빠져 산천을 헤매는 저자가 옛 다리 앞에서 감동하는 순간도 이런 때다. 전남 나주시와 함평군 학교면을 잇는 고막석교. 1000년 가까이 된 이 다리는 지금도 마을에서 들로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의 유일한 통로다. 매일 아침 고막석교 마을 사람들은 1000년의 시간을 밟고 일터로 간다.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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