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오명철/좌파와 개혁파

  • 입력 2004년 4월 22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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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한 음악평론가는 ‘부드러운 혹평’으로 유명하다. 가령 어느 성악가의 독창회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그는 “형편없다”거나 “기량이 예전만 못하다”고 하는 대신 “나는 그의 더 훌륭했던 무대를 여러 번 기억한다”고 하는 식이다. 혹평을 받은 사람도 그의 애정 어린 비평에 대해서는 수긍하게 된다고 한다. 같은 말을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의 흑인은 건국 초기 ‘아프리칸(African·아프리카인)’이라고 불렸다. 노예제도가 심화되면서 ‘니그로(negro·깜둥이)’라는 경멸적 단어가 보편화됐고,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 번지면서는 ‘블랙(black·흑인)’으로 바뀌었다. 80년대 흑인 인권운동가와 지식인들은 스스로를 ‘아프리칸 아메리칸(African-American·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동양인들도 ‘오리엔탈(oriental)’이라는 비하적인 표현 대신 ‘아시안 아메리칸’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용어 선택도 달라진다. 미국에서는 성(性)의 구분에 있어 ‘섹스(sex)’ 대신 ‘젠더(gender)’라는 용어를, ‘인종(race)’보다는 ‘민족(ethnicity)’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또 성차별을 우려해 ‘여승무원(stewardess)’을 ‘객실승무원(flight attendant)’이라고 호칭한다. ‘주부(housewife)’ 대신 ‘가사공학자(domestic engineer)’라는 용어를 권장하며, ‘매춘부(prostitute)’를 ‘성적 대용인(sex surrogate)’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대머리(bald)’를 ‘빗으로부터 자유로운(comb-free)’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국정홍보처장이 각 부처 장관실에 ‘참고자료’를 보내 “언론에 현 정부의 정책을 설명할 경우 ‘좌파(leftist)’나 ‘좌파적(left-leaning)’이라는 용어 대신 ‘개혁파(reformist)’라는 표현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 유럽에서는 좌파라는 용어가 ‘수정주의’ 정도로 받아들여지지만 한국의 경우 ‘급진’ 또는 ‘친북’ 세력으로까지 오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집권세력이 ‘개혁’이란 용어의 참뜻을 제대로 알고 실천하기 바란다. 장미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향기를 내는 법이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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