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유능한 정치인, 좋은 정치인’

  • 입력 2004년 4월 14일 18시 47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명강의 중 하나로 소문난 데이비드 거건 교수의 ‘정치적 리더십의 예술’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비교하는 것으로 첫 시간을 시작한다.

결론은 명쾌하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 속에 두 사람은 32년 함께 선거(選擧)로 집권했다. ‘선출된 권력’이다. 두 사람은 모두 민초(民草)의 심리를 꿰뚫고 그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세기적 정치지도자라고 거건 교수는 서슴없이 평가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전혀 다른 리더십은 독일을 전쟁의 참화로, 미국을 세계 초(超)강국으로 이끌었다. 히틀러는 집권 과정에서부터 상징 조작을 통한 선동으로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혼란과 무기력 속에 억눌려 있던 독일 대중의 분노를 증폭시키며 끊임없이 ‘가상의 적(敵)’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자신의 리더십을 유지했다. 반면 루스벨트는 ‘노변정담(爐邊情談)’으로 알려진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을 설득하고 지친 국민에게 미래의 희망을 제시하는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총선 아침 히틀러와 루스벨트를 새삼 거론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최근 한국 정치처럼 ‘바람’에 의해 정당지지율이 하루아침에 요동치는 ‘감성의 정치’ 속에서는 선동적 리더십과 설득형-비전형 리더십을 구별해 내기 쉽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더욱이 히틀러가 추종자 동원의 대상으로 겨냥했던 ‘떼(대중) 여론’, 즉 중론(衆論·mass opinion)과 루스벨트가 설득하고 조성하려 했던 공론(公論·public opinion)의 구별은 이번 17대 총선의 전개 양상만 보면 한국 정치 지형에서는 무의미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내건 ‘탄핵 심판론’이나 한나라당의 ‘거대여당 견제론’, 민주당의 ‘배신자 심판론’은 따지고 보면 본질적으로 상대를 부정하는 안티테제의 경쟁인 셈이다. 모두 한결같이 이해집단의 중론에 바탕을 둔 ‘배제의 논리’다. 촛불시위 현장에서 불리는 ‘너희는 아니야’라는 가사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하는 메시지인 셈이다.

각 당이 경쟁적으로 내걸고 있는 ‘개혁’도 어떻게 바꾸겠다는 것인지 유권자들에게는 미래의 그림이 명확지 않은 구호성 외침으로 들린다.

이처럼 왜 내가 돼야 하는가의 경쟁이 아니라 왜 상대가 되면 안 되는지를 내걸고 벌이는 경쟁인 만큼 ‘10년 뒤 우리는 무엇으로 먹고살까’ 등 이른바 국가적 어젠다 설정에 대한 논의가 실종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제 어느 정당이 ‘차악(次惡)의 선택인가’에 대한 논의는 접자. 어차피 국회의원이 바뀌지 않으면 정당도 정치도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유능한 정치인은 유권자를 ‘말’로 사로잡는다. 하지만 좋은 정치인은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비전’을 제시한다.

더욱이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지적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하며 당론(黨論)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치인이라면 ‘찍을 후보’로서 금상첨화가 아닐까.

이동관 정치부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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