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호기/‘돈선거’ 호각소리

  • 입력 2004년 3월 8일 19시 14분


코멘트
이 세상에서 의식 내지 문화만큼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은 없다. 제도는 법적 절차를 통해 바꾸면 되지만, 문화는 자발적인 선택이 없다면 결코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건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이유도 민주적 시민문화가 정착되는 데 오랜 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포상금 제도, 우리 정치의 고육책 ▼

이번 총선에서 흥미로운 것 중 하나가 포상금제도다. 선관위와 경찰은 선거와 관련해 돈을 받은 사실을 신고한 사람에게 받은 액수의 50배 내지 100배, 최고 1000만원에서 5000만원까지 포상금으로 지급하고 있다. 또 유권자가 금품 등을 받다 걸리면 50배의 과태료를 물게 돼 있다. 더불어 선거사범을 적발한 경찰관은 특진시키는 규정까지 마련해 놓고 있다. 돈선거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데 대한 특단의 조치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포상금제도는 공명선거에 작지 않은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몇 사람이 이미 포상금을 받았고, 신고가 점차 늘고 있다고 한다. 현재의 추세라면 거액의 과태료를 물어야 하는 사례 또한 곧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교통법규를 어기는 사람들을 촬영해 고발한 것처럼, 돈선거를 감시하는 ‘선파라치(선거 파파라치)’가 이번 총선에서 흥미로운 조역으로 등장할 듯하다.

포상금제도는 우리 정치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누구나 돈선거를 비판하면서도 돈으로 표를 사려는 관행이 사라지지 않으니 고육지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돈선거는 이른바 ‘고(高)비용 정치’의 대표다. 민주화가 이뤄진 지 15년이 지났음에도 돈선거가 계속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돈이면 모든 게 통한다는 금전만능주의 사고다. 둘째, 상대 후보가 하니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나도 어쩔 수 없다는 논리다. 돈선거가 일종의 악순환의 덫에 걸려 있는 셈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선거에 이렇게 돈이 많이 드니 자연 부정부패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이권청탁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바로 이 연쇄고리 속에서 고비용 정치는 공익보다 사익을 우선시하는 ‘저(低)효율 정치’로 귀결돼 왔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선거비용이 줄어든 게 아니라 오히려 늘어 왔으니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돈선거와 부정부패에 기반을 둔 ‘고비용·저효율 정치’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우리 민주주의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민주주의에서 고발이 부정적인 방법은 아니다. 개인주의보다 집단주의가 두드러진 우리사회에서 고발정신은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이다. 예컨대 내부고발 제도는 조직의 민주화에 작지 않게 기여한다. 고발은 일종의 호각을 부는 것이다. 호각소리는 잠자는 구성원들을 각성시키고 집단적인 담합을 저지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고발은 용기 있는 행위로 봐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상황에서 고발과 감시는 최소한의 투명성을 제공할 수 있다.

▼‘고발’보다 성숙한 시민문화 필요 ▼

그러나 포상금제도에 우려가 없는 게 아니다. 선거가 과열되면서 상대후보를 모함하는 흑색선전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깨끗한 선거를 위해 불가피하다고는 하지만 다소 씁쓸한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우리 시민사회에 만연해 있는 금전만능주의를 엿볼 수 있는 것 같은 안타까움 또한 없지 않기 때문이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고발 이상’의 것을 요청한다. 그것은 타의에 의한 통제가 아니라 민주적 시민문화를 통해 성취된다. 중요한 것은 민주적 시민문화는 국가의 의해 주어진다기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규율 및 신뢰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 사회도 민주적 시민문화를 어떻게 성숙시킬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질 높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