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17년 러시아 ‘2월혁명’ 발발

  • 입력 2004년 3월 7일 18시 58분


코멘트
“니예트(아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몇 시간째 식량 배급을 기다리던 군중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분노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1917년 3월(러시아 구력 2월). 제정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장노동자들이 “빵을 달라”고 외치며 폭동을 일으킨다.

러시아 ‘2월혁명’의 봉화가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폭동은 순식간에 도시 전역으로 확산됐다. 구호는 어느새 ‘차르 타도’로 바뀌어 있었다. 군중은 더 이상 제1차 러시아혁명(‘피의 일요일’) 당시 황제의 자비를 구하던 온순한 백성이 아니었다.

군인들도 발포명령을 무시했다. 춥고 배고픈 군중들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몰랐으나 그 기세는 사나웠다. 마침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진다. 독일과의 전쟁에 지친 제정러시아는 끝내 그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고 제풀에 쓰러졌다.

왕조의 수명을 단축한 것은 ‘스톨리핀의 반동(反動)’이었다.

제1차 러시아혁명 이후 제정러시아는 점진적 자유화의 길을 가느냐, 혁명으로 치닫느냐는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그때 역사의 물줄기를 급진쪽으로 돌려놓은 게 ‘차리즘’의 수호자 표트르 스톨리핀이었다.

당시 총리 겸 내무장관이었던 그는 니콜라이 2세가 스스로의 구명(救命)을 위해 약속했던 개혁(‘10월 선언’)을 형해화했다. 혁명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교수대는 ‘스톨리핀 넥타이’라는 악명을 얻었고, 그 죽음의 넥타이는 니콜라이 2세의 목을 죄었다.

‘2월혁명’은 지리멸렬하고 불안정했다. 피를 부르는 혁명의 갈증은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때 독일로부터 ‘혁명의 선물’이 당도한다. 러시아와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독일이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레닌이 귀국하도록 손을 써준 것.

‘볼셰비키의 모든 것’ 레닌. 그가 돌아온 뒤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기까지는 불과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70여년이 지난 1998년 7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악한 죄목’으로 처형했던 니콜라이 2세의 복권이 이뤄진다. 그의 유해 안장식에 참석한 옐친 대통령은 선언했다. “공산당이 니콜라이 2세를 처형한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였다.”

그러나 100년 뒤의 역사는 그를 또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