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조경란/올 한해 너무 길었다

  • 입력 2003년 12월 30일 18시 26분


조경란 소설가 수년 전에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갈 뻔한 고통을 겪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어떠한 나쁜 일이 와도 집을 잃는 것보다는 낫지 싶은 마음으로 견디곤 하였다. 돌아보면 한해 한해가 그랬지 싶은데 특히나 올해를 나기가 힘이 들었다. 개인적인 일들뿐만 아니라 전쟁과 참사를 비롯해 자고 나면 들리는 사건 사고 소식 또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기 힘들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한 작가의 삶이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이토록 절실히 깨달은 해도 없다. 더불어 어쩐지 모든 일마다 궁지에 몰리는 느낌이었고 자주 서러운 마음이 들었으며 나를 보호해 주던 사람마저 잃어버리는 일을 겪기도 했다. 올해야, 어서 가버려라. 잠들 때마다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는 하였다.

▼고통 속에 쓴 ‘악어이야기’▼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싶었으나 웬걸 가을 겨울이 되면서부터는 입고 있는 옷마다 유리조각이 박혀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심신이 더욱 고달파졌다. 급기야 나는 어떤 역경을 통해서만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일 거라는 슬픈 신념마저 갖게 되었다. 안팎으로 뒤숭숭한 한 해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먼 나라에서 지진이 일어난 새벽에는 내가 살고 있는 옥탑방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꿈을 꾸었고 누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 오면 안 보이는 손이 내 얼굴에 검은 천을 뒤집어씌우는 꿈을 꾸기도 했다. 시간은 말처럼 빨리도 지나가는데 올해는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어렸을 적에 나는 자주 나비 꿈을 꾸곤 하였다. 어느 날엔가는 그 나비가 내 귓속에 들어와 아주 거기서 살고 있는 느낌까지 들곤 했다. 나비는 나의 가장 친밀한 존재였고 이상이었으며 꿈이기도 했다. 물론 성인이 된 후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형태가 다르긴 했으나 매번 나에게는 그러한 존재가 있었고 나는 거기에 내 마음의 일부를 기대곤 했던 것 같다.

올해는 악어를 만났다. 제이크라는 이름의 악어가 그려진 일러스트를 방문에 붙여 두고 힘들 때마다 보고 또 보며 몇 달을 지냈다. 그림 속의 제이크는 희망을 잃은 사람들, 생을 포기하려는 사람들, 아픈 사람들, 갈 곳을 잃은 사람들, 궁지에 몰려 있는 사람들 앞에 바람처럼 나타나 연둣빛 꼬리를 탁탁 흔들곤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제이크를 발견한 사람들은 자신이 변해 가는 것을 느꼈다. 제이크는 일종의 터닝포인트 같은 것이었다. 위안받고 싶을 때, 다른 삶을 꿈꾸고 싶을 때 내면의 힘이 불러내 오는 상징적인 존재 같은 것. 제이크의 또 다른 이름은 ‘희망’이었던 것이다. 어떠한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하는 힘. 그걸 깨닫는 순간 나는 책상의 먼지를 떨어내고 앉아 악어 제이크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글이 유난히 안 써져 힘이 들었던 올해 그게 내가 유일하게 쓴 글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견디는 것이 치료이고 기다리는 것이 희망이라는 것을.

우리 생에 희망이란 게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이대로는 못살 것만 같다. 그래서 나에게는 늘 나비라든가 제이크 같은 악어들이 필요하다. 그 존재들은 나에게 말한다. 힘겨운 사투를 벌이지 않고서 정복된다면 그걸 산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새해 첫날 또 새꿈 기다린다 ▼

어떤 힘든 일이 오면 나는 이게 언젠가 이미 내가 한번 겪은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면 고통이 절반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언제나 약간의 두려움을 갖고 살면 참을 수 없는 절대적인 두려움에는 빠지지 않는다고 했다. 더 힘든 일이 또 올지 모르겠으나 생각해 보니 많은 일들이 이미 지나갔다. 같은 일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가족도 있고 해야 할 일도 있고 또 눈물을 보일 수 있는 친구도 있다면 어쩌면 우리 삶은 이대로 살아갈 만하지 않겠는가. 눈이 오랫동안 쌓여 있던 땅에서 풀은 더 푸르고 더 빨리 자란다.

새해 첫날에는 원숭이의 눈이 반짝거리고 있는 그런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는 꿈이라고 했으니.

조경란 소설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