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일과 꿈]김원준/한글에 예쁜옷 입히고 싶어요

입력 2003-12-17 18:33수정 2009-10-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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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는 문명을 돌아가게 하는 엔진오일과 같은 것이다.”(콜린 뱅스 국제타이포그래피디자이너협회 회장)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버튼을 누른다. 어제 만들던 글자를 다시금 살펴본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어느덧 6개월,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중압감은 조금 희미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서체가 세상에 나가 제대로 사랑받고 좋은 환경에서 잘 쓰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오히려 무게를 더해 간다. 늘 그렇지만, 새 서체가 사회에 배포 활용되는 단계에 들어가면 감격과 고민이 함께 따라오기 때문이다.

▼글꼴개발 10년…사명감 점점 커져 ▼

아직도 잊지 못하는 순간, 아니 평생 잊지 못할 감격의 순간이 있었다. 처음 서체 작업을 끝내고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너무도 익숙한 형태의 글꼴이 눈에 들어왔다. 내 손을 거쳐 태어났으되 타인의 손을 통해 세상에 선을 보이고 웃고 있는 나의 서체를 본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원래 보고 싶던 책을 뒤로하고 어느새 전혀 상관없는 책을 들고 계산대에 서 있었다. 내 손을 거쳐 간 서체가 어떤 이의 손에서 드디어 꿈을 키우게 되었음을 확인한 순간의 감격, 이 감격은 1년여의 피로를 모두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처음 한글 서체를 만들던 때만 해도 길디 긴 제작기간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중도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10여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포기하지 않은 나 자신이 자랑스러운 이유는 여전히 서체에 대한 열정과 남다른 보람 때문일 것이다. 내 손에서 창조된 서체들이 사회에서 대접받으며 중요한 재료로 활용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앞으로 몇 십 년이 지나도 쓰일 서체를 만들겠다는 포부가 점점 커진다.

이제는 장시간의 작업도 버릇이 된 듯, 힘들어하는 후배들에게 누구도 경험 못할 몇 년 뒤의 보람과 만족에 대해 떠들곤 한다.

어떤 이들은 한글 서체작업의 복잡하고 힘든 작업과정을 지켜보면서 “알파벳 문화권의 문자가 좋은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일리가 없지 않다. 100여자 미만의 개발로도 충분히 활용이 가능한 영자의 구조가 부러울 때가 있다. 한글은 최소한 2350자를 만들어야 활용이 가능하고, 요즘은 1만1172자를 만들어야 컴퓨터에서의 입출력이 가능하다. 그 과정에 들어가는 시간과 개발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그러나 개발하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한글의 장단을 논할 수는 없다. 한글의 우수성은 그런 문제를 훌쩍 뛰어넘는다. 세계의 문자 전문가들이 한글의 과학성을 그토록 격찬하지 않았던가. 세계 유일의 ‘목적을 가지고 개발’된 문자이며, 쉽게 배우고 활용할 수 있는 ‘소리문자’라는 장점이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글문화의 한 모퉁이돌이 되겠다는 긍지와 자부심이 오늘도 나를 한글 서체를 개발하는 일로 이끌고 있는 것이고 나로 하여금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고 감히 말하게 만드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의 발전에 일조하고 있는 마당에 어찌 개발이 어려우니 쉬우니 하며 불평할 수 있겠는가. 어찌 보면 애당초 포기하지 못할 중책을 맡은 셈이다.

▼작업과정 힘들지만 ‘남다른 보람' ▼

사람이 먹는 음식에도 가지각색의 것들이 있다. 요란한 음식부터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물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지 않은가. 문명 속에서의 문자는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어 사람들이 그 존재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물과 같은 존재다.

내가 만든 서체가 세상에 나가 한글을 사용하는 모든 이들에게 편리함을 준다면 이 땅에서 중요하고 가치 있는 한글 문화사업의 발전에 일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이 땅의 모든 한글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니 이보다 멋진 일이 어디 있겠는가?

늘 새 한글서체 개발의 욕심을 내는 것도 아마 이러한 중요한 존재를 지키고 만들어 가는 전사(戰士)로서의 사명감 때문이다.

▼약력 ▼

△1970년생 △국민대 시각디자인과 졸업 △윤디자인연구소 입사 △한글서체 40여종 개발

김원준 윤디자인연구소 폰트디자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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