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소라단 가는 길'…평생을 짓누르는 '전쟁'

입력 2003-12-12 17:20수정 2009-10-10 07:17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소라단 가는 길/윤흥길 지음/325쪽 8500원 창비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작가가 6년 만에 소설집 ‘낙원? 천사?’(민음사)를 펴낸 이후 다시 다섯 달 만에 선을 보인 연작소설.

땟국이 줄줄 흐르는 얼굴로 방죽 길을 내달리던 개구쟁이들이 모처럼 모여 앉았다. 국민학교 동급생 시절부터 머리 좋기로 소문났던 김 선생. 그가 모교 교장으로 영전한 뒤 ‘졸업 사십 주년 기념 재향 재경 동기동창회 합동 모교 방문 행사’를 개최한 것.

여름밤 운동장의 매캐한 모깃불을 둘러싸고 앉은 인철 만재 등 마흔명 초로의 남정네들은 차례로 ‘야그 일발 장전, 발사’를 펼친다. ‘그 나이에 이르도록 산전수전 다 겪어 할말들이 무진장이련만, 늙다리 동창생들은 다른 화제 다 제쳐놓고 약속이나 한 듯이 너도나도 오로지 전쟁 이야기에만’ 매달린다.

‘농림핵교 뱅죽’을 히죽히죽 웃으며 걸어 다니던 아이 밴 미친 여자, 어느 날 방죽 아래로 떠내려 온 흑인 아기 시체. ‘뿔갱이(빨갱이) 자석놈’ 소리가 듣기 싫어 아이들 사이에서나마 ‘국군 영웅’이 되고 싶어 했으며 어느 날 담력 내기를 벌이다 열차에 받혀 죽은 무환이, 미국 정치가들에게 보낸다는 ‘멧돼지(메시지)’ 행사 때마다 열손가락을 깨물고 혈서를 쓰며 고등학생 행세를 했던 창권이형. 신분이 다르지만 친구로 지내다가 결국 일본 밀항과 빨치산으로 입산이라는 서로 다른 길을 택한 금옥·명주누나, 엄마 아빠가 죽창에 찔려 죽는 꼴을 본 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 명은이….

낄낄거리며 털어놓는 저마다의 추억에는 어느새 절박했던 시대의 고난이, 다같이 상처받은 존재이면서도 때로는 서로 등져야 했던 과거의 상흔이, 그 신산했던 시절을 겪고 얻어낸 것은 무엇인가라는, 무거운 질문이 묻어난다.

사업이 망한 뒤 감옥살이에다 가정까지 망가진 인철은, 비록 초라하고 살벌했던 유년기였을망정 아픔을 딛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어린 시절의 순수헌 기분’에서 길어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 무렵에 유약허고 무력헌 존재에 지나지 않었던 우리 어린애들은 한편으로 전쟁이란 괴물한티 쫓기고 밤마다 가위눌리는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른들이 몰르는 호젓헌 구석에 숨어서 그 전쟁을 우리 방식대로 만판 즐긴 심이지. 말허자면 한몸땡이 안에 순진무구헌 동심 세계허고 발랑 까진 악동 세계가 의초롭게 공존하던 시절이었지.”(‘상경길’ 중)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