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박영우, '訃音'

  • 입력 2003년 12월 1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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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간신문에

흑백 사진 한 장과 함께 실린

부음란을 바라볼 때면

죽어라 하고 싶은 일만 하다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다가

죽어가고 싶다.

-시집 '사랑은 없다'(문학수첩)중에서

이 아침, 세수를 하고 조반을 먹으며 출근 준비를 서두르는 팽팽한 긴장의 시간, 신문 한 모퉁이에선 간밤에 몇 사람을 데려갔구나. 가끔 익숙한 이름을 보며 끌끌 혀를 차기도 하지만 타인의 부음은 다만 정보일 뿐. 우리는 신문을 말아 쥐고 저마다 바삐 먼 무덤으로 향한다.

대체 무슨 사업을 벌이고 있는 걸까. 죽음은 완전 고용. 나이도, 학력도, 연줄도, 인물도, 시험도, 면접도, 적성도, 월급도 불문. 모두들 데려다가 꽃단장 시켜놓고 별 타령 부르는 신선놀음인지, 이승의 전과만큼 재봉틀 달달 박는 박음질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오염된 은하수 변에 비닐 깡통 쓰레기 줍는 영세민 취로사업을 시키는지 여하튼 죽음은 태고 이래 완전 고용. 사고를 통한 수시 고용. 노화를 통한 정기 공채. 전쟁을 통한 대거 특채.

‘죽어라 하고 싶은 일만 하다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다가’ 죽고 싶은 게 저이뿐일까. 현실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나를 먹여 살리며,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내 생사여탈을 쥐고 있지는 않은가.

내용은 ‘알 수 없음’이지만 형식은 ‘엄연한’ 죽음. 죽음은 죽기 전까지는 ‘저기 저곳’의 일이지만 그걸 인식하는 순간 ‘여기 이곳’에 영향을 미친다. 부음란을 보며 삶의 군더더기를 덜어낼 수 있다면.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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