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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8월 1일 17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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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빛 가운데로 들어가면’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가 윤흥길(61)의 다섯 번째 중단편집. 작가는 황폐한 인간성, 억압의 시대가 남긴 상처, 우리네 일상의 기본과 분단 문제 속으로 경쾌하게 질주한다.
‘철저한 리얼리즘적 기율에 의해 시대의 모순과 근대사에 대한 심원한 통찰력을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상에 대한 작고 따뜻한 시선을 아울러 갖추고 있다’(문학평론가 권영민)는 작가론은 이 책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어느 겨울 지방대학의 캠퍼스.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의 키에서 성장을 멈춘 ‘천사’ 또는 ‘오군’이라 불리는 이가 교정 한구석에서 동사(凍死)한다. 학보사 기자 박기현은 주간 교수에게 간신히 허락을 얻어 ‘천사’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준비한다.
보육원 출신인 소년은 대학캠퍼스에서 기거하며 학생들을 대신해 연애편지를 배달해 주거나 도서관의 자리를 잡아주고 때로는 숙제를 대신 하는 등의 대가로 동전 몇 닢을 얻곤 했다. 캠퍼스 구성원들은 그를 ‘천사’라고 일컬으며 애정으로 대해 주었다. 한사코 캠퍼스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그에게 그곳은 ‘낙원’이었다.
박기현은 ‘천사’와 가깝게 지낸 학생들, 식당 아주머니, 총학생회장, 경비원들을 인터뷰한다. ‘우리 곁에 머물렀던 천사 오군’에 대해 눈물짓는 이들의 대척점에는 그와 연관되기를 거부하는 각종 학생단체와 학교측이 싸늘한 시선을 던진다. 작성한 기사는 결국 채택되지 못하고 박기현은 학보사를 그만둔다. ‘천사’의 ‘낙원’은 더 이상 그가 머물 만한 곳이 되지 못했다(‘낙원? 천사?’).
작가는 “‘천사’를 통해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떤 생명이든 다 귀하지 않습니까. 무관심, 비정(非情) 때문에 존엄한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우리 사회에 많은 것 같습니다. 보호해야 할 대상을 가치 없는 존재로 밀쳐버려서는 안 되지요.”
표제작에 이어 작가는 군사독재 시절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동료의 이름을 털어놓은 청년의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산불’을 매개로 모색하고(‘산불’), 우리 민족의 주식인 ‘쌀’을 통해 분단 문제를 색다른 각도에서 조명한다(‘쌀’).
윤흥길은 자신의 소설을 ‘아날로그 소설’이라고 부른다. 그는 묵은 것을 버리지 않는다. 상처와 잘못을 드러내고 그것을 끌어안고 반성하는 것에서 진정한 행복이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쇄매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과 장점을 제대로 살리는 것이 본격문학을 살리는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영상매체가 승하다고 따라가면 소설이 제대로 따라갈 수 있나요? ‘아날로그 소설’을 써오던 사람들이 시대 조류에 영합하거나 편승해서 자기 근본을 바꾸거나 버리고 좇는 것은 별로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연작소설집 ‘때와 곳’을 창작과비평사에서 올 가을에 출간할 계획이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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