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359…아메 아메 후레 후레(35)

  • 입력 2003년 7월 4일 17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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쉭 쉭하고 기통 밑에서 뿜어 나오는 새하얀 증기에 열차의 모습이 완전히 가렸지만,

소녀는 연기 속을 뚫고 올라탔다. 차량과 차량 사이 연결 칸에는 배낭을 베개 삼거나

고리짝을 껴안고 신문지 위에 누워 있는 남자가 몇 명이나 있었다. 일본사람? 조선사

람? 만주사람? 중국사람? 소녀는 한 남자의 배낭에서 삐져나와 있는 신문의 큰 제목

을 읽었다. 만현연폭(萬縣連爆), 부두염상(埠頭炎上), 무한(武漢)에서 십기격추(十機

擊墜), 능취(陵鷲), 강상(江上)에서 삼척(三隻) 격침. 아사히신문이니까, 이 남자는

틀림없이 일본사람일 거야. 뭉글 뭉글 증기가 자욱한 홈에 종소리가 딸랑 딸랑 울려

퍼지고, 열차는 덜커덩 크게 흔들리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칙…칙…칙…칙…, 그런

데 대체 무슨 일일까? 낮에는 강에 떨어지는 꿈…아까는 별이 총총한 하늘로 떠오르

는 꿈…떨어졌다 떠올랐다…점쟁이가 있으면 꿈 풀이를 해달라고 할텐데, 뭔가를 암시

하고 있는 거야, 나, 꿈같은 거 어쩌다 한 번 꿀까말까 한데…이상해…그런데 어느 꿈

에서나 나를 포근히 감싸 안아주는…소녀는 꿈 속 기억을 더듬으면서, 아직 가누지 못

하는 고개를 받쳐주는 커다란 손바닥에 매달리려 하였지만, 칙, 칙, 칙, 칙, 소리의

간격이 짧아지고, 안동역 홈의 불빛이 멀어지면서 희미한 꿈은 더더욱 희미해져, 새벽

달처럼 혼의 어둠에 녹아들고 말았다, 칙 칙 칙 칙 칙 칙….

자리로 돌아가자 사냥모 쓴 남자 옆에 하얀 모시 저고리를 입은 남자가 술 냄새를 풍

기며 앉아 있었다. 남자는 소녀가 창가 자리에 앉자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씨익 웃

고는 땅콩 주머니를 내밀었다. 배는 잔뜩 부른데, 안 받으면 뭐라고 한마디해야 될 테

고, 그럼 아저씨도 뭐라 뭐라 틀림없이 끼어들겠지, 술 취한 사람은 큰 소리로 떠들어

대고, 말을 꺼냈다 하면 끝이 없으니까 시끄러워서 다들 잠이 깰 테니까, 할 수 없지

뭐 그냥 받자. 소녀는 오른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땅콩 주머니를 뒤집어 터는 바람

에 소녀는 재빨리 왼손까지 갖다댔지만, 땅콩은 거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소녀

는 땅콩을 주어 치마에 담고, 남자의 눈을 의식하면서 껍데기를 까 입에 던져 넣었

다.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까딱 숙이는데, 남자가 갑자기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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