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영화]'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

  • 입력 2003년 5월 30일 17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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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글렌 예페스 엮음 이수영 민병직 옮김/349쪽 1만2000원 굿모닝미디어

‘매트릭스’(Matrix·인공지능이 만든 가상세계)는 이미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이 시대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주요한 문화현상이 됐다. 첫 편 이후 4년 만에 선보인 속편 ‘매트릭스2:리로디드’는 국내에서 개봉된 지 8일 만에 관객 170만명을 돌파하며, 이미 ‘봤냐 못 봤냐’의 문제가 아니라 ‘몇 번 봤냐’를 물어야 할 정도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1999년 개봉 당시 이 영화는 눈부신 첨단 영상기술을 통해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한편,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가상일 수 있다는 ‘놀라운’ 발상으로 전 세계에 충격을 던졌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이 영화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영화가 과학기술과 인간본질이라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인류가 오래 전부터 고심해 온 문제들을 집약해 냈다는 데 있다. 사실과 인식, 현실과 가상, 자유와 통제, 신성과 인간, 물질적 발전과 보편 윤리….

이 책에선 ‘매트릭스’의 종주국인 미국에서 철학자, 경제학자, 영문학자, 종교학자, SF작가, 컴퓨터 프로그래머 등 14명의 전문가가 다양한 관점에서 ‘매트릭스 현상’을 분석하며 현대사회의 문제를 진단했다.

▽리드 머서 슈셔드(메리마운트 맨해튼대 교수·미디어비평)=영화 ‘매트릭스’는 액션 활극 영화의 외피를 뒤집어 쓴, 인간의 의식에 관한 연구 논문이다. 매트릭스는 바로 우리의 현재 세상을 암시한다. 인류가 생태적 균형을 파괴하는 바이러스임을 기계들이 깨달으면서 매트릭스가 발흥하기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라일 진더(인디애나대 교수·과학철학 및 인지과학)=매트릭스 안의 사람들은 매트릭스가 제공하는 감각 데이터들의 조합을 현실로 여기지만, 매트릭스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실재하는 현실을 인식한다. 영화 ‘매트릭스’는 실재론을 따르는 셈이다. 그러나 관념론에 따르면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인 정보들뿐이다. 현실이 정말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제임스 포드(웨이크 포레스트대 교수·종교학)=매트릭스의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처럼 보이는 거짓된 세계라는 점에서 윤회에 비유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 신념, 현상이 영원하다고 믿으며 욕망과 집착에 빠져 있는 세속적 인간의 삶이다. 주인공 ‘네오’처럼 훈련을 통해 마음을 다시 프로그래밍해 ‘매트릭스’에서 깨어나야 한다.

▽피터 베트키(조지 메이슨대 교수·경제학)=매트릭스에서 프로그램화된 풍요로운 삶을 택할 것인지, ‘현실’의 험난한 주체적 삶을 택할 것인지 결정하라며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을 내밀었다. 이는 수동적 안정을 보장하는 체제와 개인적 자유를 보장하는 체제 사이에서의 선택과 같다.

▽빌 조이(선마이크로시스템스 대표 겸 수석연구원)=2030년이면 컴퓨터는 물리학 유전학과 결합되어 세계를 변화시킬 만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이 기계든, 유전자조작 생물이든, 둘의 결합체이든 이들이 ‘자기복제’ 능력을 갖게 될 때 자연은 인간 대신 그것을 협력자로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단 며칠 만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제 과학과 기술을 통한 무제한적 성장을 추구하며 그에 따르는 명백한 위험을 받아들일 것인지 근본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닉 보스트럼(예일대 교수·과학철학 및 확률이론)=이제 포스트휴먼(Post-Human·인간 이후) 사회를 준비해야 한다. 만일 인류가 가까스로 멸망을 피해 포스트휴먼 시대에 도달할 수 있다면 인간은 영화 ‘매트릭스’처럼 인간 사회 전체를 시뮬레이션하며 평화롭고 아름다운 가상세계에서 착각 속에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뮬레이션을 만드는 포스트휴먼 인류가 이미 시뮬레이션된 존재이며 그 창조자 역시 시뮬레이션된 존재일지도 모른다.

‘매트릭스’가 우리의 현실이 될지, 혹은 이미 우리의 현실인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현실은 극복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나름의 대안 또는 극복방안을 제시했지만 대부분 ‘매트릭스’를 ‘타자(他者)’로 보고 극복하려 한다. 그런데 매트릭스에 대항하는 ‘네오’마저도 매트릭스 시스템의 일부라면 이건 애초부터 실패한 싸움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추론이 모두 동일한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결국 인간 자신이 매트릭스를 만든다는 것이다.

매트릭스가 인공지능인지 사회제도인지 종교인지 이념인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이 진정 ‘자유’를 되찾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과 매트릭스가 둘이 아님을 깨닫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자신이 곧 매트릭스임을 ‘자각’하는 자가 매트릭스의 주인이 된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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