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임채청/'철새'들이 웃고 있다

  • 입력 2003년 4월 29일 18시 31분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정치인답지 않게 세간의 이목을 피하는 듯한 인사들이 꽤 있다. 행여 남의 귀에 들어갈세라, 눈에 띌세라 고양이걸음을 하고 있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금방 웃었다 찡그렸다 낯빛을 고치고 눈동자 돌아가듯 소신을 바꿀 수 있는 그들이지만 아무래도 때가 아니라고 판단해서인지 소리를 죽이고 몸을 움츠리는 모습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들은 간절히 소망할 것이다. ‘세상이여, 우리의 전비(前非)를 잊어 달라’고. 아니면 ‘당분간 우리에게서 눈길을 거두어 달라’고.

지난해 대선후보들의 시세(時勢)가 변동될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다 끝내 당적을 바꿨거나 또는 그러지 못해 안달했던 의원이 그들이다. 흔히 ‘철새 정치인’이라고 불리지만 혹자는 철새를 모독하지 말고 대신 범국민적 박멸 캠페인을 위해 ‘바퀴벌레 정치인’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런 그들이 요즘 웃음을 꾹 참고 있는 것 같다. 조화무궁(造化無窮)한 정치판에선 역시 기다리면 솟아날 구멍이 생기는 법이라며 희희낙락할 수도 있다.

우선 고영구 국가정보원장 파문과 4·24 재·보선이 한동안 주눅들어 있던 그들의 숨통을 틔워 줬다. 고 원장에 대한 국회 정보위의 ‘부적절’ 결론에 합의해 준 여당 의원들과 그들을 보수라고 성토하면서 교체를 주장하는 여권의 신주류 인사들, 또한 고 원장 문제로 주먹다짐까지 벌인 야당 의원들과 재·보선에 출마한 개혁신당 후보를 지원한 의원에 대한 야당 내 출당 논란 등 뭐가 뭔지 모르게 뒤죽박죽인 정치상황이 철새들에게 모처럼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심 이렇게 되물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철새라고? 솔직히 3김 정치와 지역주의 유산을 빼고 나면 오십보백보인 한국의 정당에 진짜 ‘텃새 정치인’이 얼마나 있느냐. 민주당은 다 진보고 한나라당은 다 보수일까. 또 민주당 지지자는 다 진보고 한나라당 지지자는 다 보수라고 할 수 있나. 그렇고 그런 당적을 옮겼거나 옮기려한 게 뭐 그리 대수라고 ‘텃세’인가. 지금 큰소리치는 사람들 중에도 정치적 혈통이 적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관심은 온통 내년 총선뿐인 철새들을 더욱 살판나게 하는 것은 또다시 불거진 신당론이다. 정치판 생리에 달통한 그들은 신당론의 전도를 뻔히 내다보고 있을 게 틀림없다. 여권의 신당 창당이 본격화되면 정치권 전체가 연쇄적으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처음에야 정치개혁이니 보혁(保革) 구도 정립이니 하는 명분을 내걸지만 정치는 결국 현실이란 것을. 특히 엄존하는 지역구도의 벽을 일거에 허물어뜨릴 수는 없는 본질적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지역구도의 경계만 다소 달라진 신(新)지역주의의 도래를 기대하면서 나름의 희망을 품고 있을 터이다. 당장 혼란을 틈타 적당히 ‘정치적 전과(前科)’를 ‘세탁’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총선을 앞둔 각 정치세력의 세(勢)불리기 경쟁에 무임승차해 ‘왕따 신세’를 면하고 잘하면 몸값도 톡톡히 올릴 수 있다는 점까지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변신에 성공한 몇몇 철새가 내년에 다시 금배지를 달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새 정치를 외치는 것은 상상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임채청 논설위원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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