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二. 바람아 불어라

  • 입력 2003년 4월 3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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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계를 따라 다니는 패현 동무들도 딱하오. 지금이라도 내가 풍읍 젊은 형제들을 몰고 달려나가면 한 싸움으로 그대들 모두를 개 잡듯 할 수 있소. 그러나 같은 땅에 나고 자란 정 때문에 참고 기다리는 것이니 이제 더는 저 같잖은 허풍선이에게 휘둘리어 귀한 몸을 상하게 하지 마시오.”

그 말에 어지간한 패공도 더는 견뎌내지 못했다. 너무 화가나 숨이 턱턱 막히고 눈앞이 아찔해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그래도 패공은 장차 한 시대를 새로 열 사람이었다. 두 허벅지로 말 등을 죄어 겨우 버티면서도 입은 기세를 잃지 않고 크게 꾸짖었다.

“너야말로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떠든다만, 성이 떨어지고 내 앞에 끌려와서도 그렇게 떠들 수 있는가 보자!”

그러나 가진 힘을 다 쥐어짜 지른 소리였다. 패공은 말을 끝내기 바쁘게 곁에 있는 번쾌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나를 부축해라. 특히 성 위에서 내가 쓰러지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어서 이곳에서 물러나자.”

번쾌가 그 말에 놀라 바라보니 패공의 얼굴이 이미 흙빛이었다. 대강의 사정을 알아차린 번쾌는 짐짓 성벽 위까지 들릴 만한 큰소리로 패공을 말렸다.

“패공께서는 저 쥐 같은 무리와 다투실 것 없습니다. 저희들이 성을 깨뜨리고 저놈을 사로잡아 무릎을 꿇릴 것이니 편안히 구경이나 하시며 기다리십시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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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패공을 잡아끌 듯 부축하여 성벽아래서 빼냈다. 패공도 못이긴 척 끌려나왔으나 옹치의 눈길을 벗어낫다 싶자 이내 정신을 잃고 말등에서 스르르 흘러내리듯 떨어졌다. 번쾌가 그런 패공을 재빨리 받아 들쳐업고 가까운 군막 안에 뉘였다.

“패현으로 돌아간다. 에움을 풀고 군사를 물리되, 적이 뒤쫓아 나올 때를 대비하라!”

한참 뒤에 정신을 차린 패공이 그렇게 명을 내렸다. 그래도 믿고 받아들였던 사람의 배신이 준 상처에다 처음으로 겪은 군사적 패배가 준 충격까지 겹쳐서인지 얼굴은 이미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에 번쾌와 조참은 옹치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군사를 물려 패현으로 돌아갔다.

그 뒤 옹치는 패공 유방이 언뜻 지나쳐 듣기만 해도 이맛살을 찌푸리는 이름이 되었다. 그 만큼 유방이 받은 상처는 깊었고 옹치에게 품은 원한은 컸다. 뿐만 아니라 유방이 뒷날 한나라 고조(高祖)가 되어서인지, 원래 고유명사인 옹치(雍齒)는 ‘마음속으로 깊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란 뜻의 보통명사로 동양 삼국에 두루 쓰이는 말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음이 변해 <옹추>라고 하기도 한다.

패현으로 돌아간 유방은 그곳에서 여러 날 병을 다스렸다. 그러나 병 줄에서 놓여난 뒤에도 옹치와 풍읍 젊은이들의 배신이 준 상처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바쁘게 풍읍을 되찾을 궁리부터 했다.

하지만 급한 것은 마음뿐이고 형편이 따라주지 않았다. 지난번에 오기 하나로 앞 뒤 없이 성을 들이치다가 적지 않은 장졸이 상했을 뿐만 아니라, 몇 번이나 내쫓기는 바람에 사기까지 꺾여 있었다. 그런 유방의 군사들에 비해 옹치와 그가 거느린 풍읍 젊은이들은 한번 싸움에 이겨 사기가 올라있었다. 거기다가 풍읍의 성벽은 높고 채비는 단단하니 무슨 수로 유방의 군사들이 이겨낼 수 있겠는가.

그때 소하가 가만히 유방을 찾아보고 일러주었다.

“진왕(陳王·진승)이 장함에게 쫓겨 간 곳을 모르게 되자 진왕을 따르던 동양현(東陽縣) 사람 영군(寧君)과 능현(凌縣) 사람 진가(秦嘉)는 초나라 왕족인 경구(景駒)를 가왕(假王·임시왕)으로 세웠다고 합니다. 이제 적지 않은 군사를 모아 유현(留縣)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니 그리로 찾아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유현은 패현 동남으로 백리도 못되는 곳이었다. 유방도 진가와 경구의 소문을 못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소하의 말을 듣고 보니 처음 듣는 듯 새로웠다.

“그들이 내게 힘을 빌려줄까?”

당장은 풍읍을 되찾고 옹치를 사로잡는 일밖에 눈에 뵈는 게 없는 유방이 그렇게 묻자 소하가 조금은 차갑게 말했다.

“패공께서 이미 진왕을 섬기기로 하셨으니, 그를 이은 경구를 따르는 것이 무에 욕될 게 있겠습니까? 또 패공께서 가왕 경구를 섬기겠다면, 풍읍을 치는 것도 결국은 그를 위한 일이 되는데 무슨 까닭으로 그가 마다하겠습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가왕은 반드시 패공에게 힘을 빌려줄 것입니다.”

유방이 지나치게 감정에 휘몰리고 있는 게 딱하기는 하지만 일은 틀림없다는 투였다. 그같은 소하의 말에 유방은 더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막빈(幕賓)과 장수들을 모두 불러들이게 했다.

“지금부터 모두 유현(留縣)으로 간다. 가왕(假王)께 군사를 빌어 풍읍부터 되찾고 보자!”

유방은 의논이랄 것도 없이 그렇게 말하고 그날로 군사를 움직였다. 길이 멀지 않은데다 마음이 급해 재촉해서인지 그날 날이 저물기도 전에 패공의 군사들은 유현에 이를 수 있었다. 멀리 유현 성이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앞서 살피러 갔던 군사가 돌아와 패공에게 알렸다.

“언덕 아래 숲 속에 장정 백 여명이 모여 있습니다. 모두 병장기를 갖춘데다 마필(馬匹)도 대여섯은 됩니다.”

“가왕의 군사들이냐?”

곁에 있던 노관이 긴장하며 묻자 그 군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어디 멀리서 온 무리로 보이는데, 짐작에는 그들 역시도 우리처럼 가왕을 찾아뵈러 가는 길인 듯했습니다.”

군사의 말을 듣고있던 패공이 그 어떤 예감에 내몰렸는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서둘러댔다.

“그렇다면 성안으로 들기 전에 먼저 그들을 만나보는 게 좋겠다. 별로 큰 세력이 아니라도, 여러 갈래를 모아서 가면 가왕이 더 기뻐하실 것이다.”

그리고는 앞장서 말을 몰아 그 군사가 일러준 숲 쪽으로 갔다. 비록 옹치에게 다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수천의 군마였다. 그들이 몰려가자 모르는 이에게는 자못 위세가 있어 보였다. 갑자기 몇 십 배의 군사들에게 에워싸인 꼴이 된 숲 속의 백 여명 장정들도 적지 아니 놀랐다. 겁먹은 눈길로 이쪽 저쪽을 살피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대들은 어디서 온 장사들이며 누가 이끌고 있는가? 그대들의 우두머리를 만나고 싶다.”

패공이 그들 앞으로 말을 몰아 나가며 목소리를 가다듬어 소리쳤다. 갑자기 웅성거리던 장정들이 갈라서며 그 사이로 한 사람이 천천히 말을 몰아 나왔다. 말은 보기에도 힘찬 구렁 말이었으나 그 위에 앉은 사람은 좋은 천으로 정성 들여 지은 화복(華服)차림부터가 벌써 한 갈래 군사를 이끄는 무장(武將)은 아니었다. 다가올수록 뚜렷해지는 그의 생김도 장수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흰 살결에 붉은 입술이며 짙은 눈썹이 화장이라도 한 듯 고왔고, 비단옷에 쌓인 몸매는 여자가 남자 옷을 입고 나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호리호리하고 낭창거렸다. 나이는 서른 네댓쯤 될까, 그것도 가까운 데서 한참 들여다본 뒤에야 그 나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젊었다.

그를 보는 순간 패공은 묘한 충격과 감동을 경험했다. 원래 그는 책상물림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 중에서도 나약한 주제에 턱없이 까다롭고 말만 반드르르한 유자(儒者)들은 특히 싫어해, 어쩌다 그들을 만나면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비웃거나 빈정거려 약을 올리기도 하고, 힘으로 눌러 골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저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별나게 쓸 일이 있어 하늘이 낸 사람일 것이다….)

유방은 그런 눈길로 그 사람을 쳐다보다가 다시 불쑥 떠오른 엉뚱한 망상에 가슴 설레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쓰임은 나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늘은 나를 위해 저 사람을 내고 키워온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나를 도우러 보냈다….)

그때 그 젊은 서생(書生)이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부드럽고도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하비(下비)에서 온 장량(張良)이란 사람입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그 말을 듣고서야 퍼뜩 정신이 든 유방이 마주 손을 모으며 다시 물었다.

“장공(張公)께서 이끄시는 장사들은 누구며 지금 어디로 가는지요?”

“진왕께서 장초(張楚)를 일으키시어 포악한 진나라에 맞서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가진 것을 다 풀어 모은 장사들입니다. 진작부터 그 깃발아래 들어가 작으나마 힘을 보태고 싶었으나, 재주가 없고 덕이 엷은 탓인지 지난달에야 겨우 장사 백여 명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진왕께서 장함에게 쫓겨 어디에 계신 지 알 수 없게된 뒤라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습니다. 달포나 사방으로 수소문하며 떠돌다가 얼마 전에야 영군(寧君)과 진가(秦嘉) 장군이 가왕(假王)을 모셨다기로 가왕께라도 의탁하고자 이렇게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누구시며 어찌하여 이렇게 저희를 찾아오셨는지요?””

평소 패공 유방은 성격이 느긋하고 자신을 남에게 잘 드러내지 못해 자칫 오만하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만큼 말이 거칠고 함부로 속을 드러내 보이는 편이었으나 어찌된 셈인지 그날은 겸손하면서도 조심스럽기가 전에 없이 유별났다.

“나는 패현 풍읍 중양리에서 나고 자란 유방이란 사람이오. 패현 부로(父老)들의 추대를 받아 패공이 되었으나 세상이 어지럽고 간사한 도적들이 많아 제 땅을 지키기도 어렵구려. 힘없고 어리석어 속읍(屬邑)인 풍읍조차 빼앗기고 이제 가왕께 군사를 빌러 가는 참이오.”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그 깃발아래 드는 길이라도 남을 찾아갈 때는 남을 찾아가는 예절이 있는 법이오. 이제 날이 저무니 가왕을 찾아 뵙는 일은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이 숲에서 함께 쉬는 게 어떻겠소? 나를 보잘것없는 시골 무지렁뱅이라 버리지 않으신다면 하루밤 술이라도 나누며 선생의 고견(高見)을 듣고 싶소.”

유방이 어울리지 않게 겸양을 떨다가 마침내는 새파랗게 젊은 장량을 선생이라고까지 높여 부르자 번쾌가 어이없다는 듯 노관을 돌아보았다. 노관이 눈을 찡긋하여 번쾌가 함부로 끼여드는 걸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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