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二.바람아 불어라

  • 입력 2003년 3월 13일 18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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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께서는 저 두 사람이 원하는 바를 알지 못하시는군요. 무신(武臣)과 장이(張耳), 진여(陳餘)는 말채찍을 흔드는 것만으로도 조나라의 수십개 성을 떨어뜨렸으며 제각기 남면(南面)하여 왕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누구는 왕이 되고 누구는 경상(卿相)으로 머물겠습니까? 무릇 임금과 신하의 지위는 결코 같은 것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처음 조나라를 얻었을 무렵에는 대세가 안정치 못해 나라를 세 토막내어 각기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나이를 따져 무신을 앞세워 왕위에 올림으로써 조나라의 인심부터 거두어들였지요. 하지만 이제 조나라는 땅도 사람도 모두 그들의 것이 되었으니 장이와 진여도 나라를 나누어 왕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할 구실과 틈탈 겨를이 없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장군께서 조왕을 가두고 계시니 저 두 사람은 겉으로는 구하려고 애쓰는 척하고 있으나 실은 연나라가 그를 죽여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두 사람은 조나라를 둘로 나누어 각기 왕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조나라로도 연나라를 가볍게 여기는데, 하물며 두 사람의 현명한 왕이 서로 돕고 의지하며 연나라에 자기들의 전왕(前王)을 죽인 죄를 묻는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모르긴 하되 그들이 힘을 합친다면 연나라를 멸망시키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연나라 장수는 조왕을 돌려보내 주었고, 그 막일하는 군졸[시양졸]은 제 말대로 조왕을 수레에 태워 모셔왔다. 진왕과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당시 새로 선 왕들과 그 장상(將相)들 사이를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예이다.

진승이 군사를 일으킨 뒤 많은 호걸들이 곳곳에서 봉기했으나 자립할만한 세력이 못되는 이들은 대개 진승 밑에 들기를 원했다. 따라서 겉보기에는 진승에게 복종하는 듯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승의 기세가 좋을 때뿐이었다. 부장(部將)들이 하나 둘 자립해가면서 그들도 복종을 거부했는데 그걸 잘 드러내는 일이 무평군(武平君) 반(畔)의 죽음이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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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승이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 능(陵) 사람 진가(秦嘉), 질현(9縣) 사람 동설(董설), 부리(符離) 사람 주계석(朱鷄石), 취려(取廬)사람 정포(鄭布), 서(徐) 사람 정질(丁疾)등도 따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들은 서로 연합하여 담현(담縣)에서 진나라 동해(東海)군수 경(慶)을 에워싸고 있었으나 쉽게 이기지 못했다.

그 소식을 들은 진왕은 무평군 반을 장군으로 삼아 담현성을 에워싸고 있는 의군(義軍)들이게 보냈다. 그들을 자신의 세력에 편입시켜 감독하고 통솔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진가는 무평군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립하여 스스로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무평군은 나이가 어려 군사를 부리는 일에 밝지 못하니 그의 말을 따르지 말라!”

거느리고 있던 군리(軍吏)들에게 그렇게 명을 내려 무평군을 따돌리더니 마침내 진왕의 명을 위조해 그를 죽여버렸다. 한때 명목상으로나마 진왕을 저희 주인으로 받들었던 다른 봉기군 우두머리들에게 복종이란 게 대개 그 정도였다.

장함이 진현(陳縣)으로 밀고든 것은 진왕이 그렇게 외로워진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한때 강대했던 초나라를 자처했던 세력이라 그런지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는 않았다. 장함의 군대가 진현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상주국(上柱國)인 방군(房君) 채사(蔡賜)가 대군을 이끌고마주쳐 나왔다.

채사는 상채(上蔡) 사람으로 일찍부터 초나라에서 무관(武官)으로서는 가장 높은 상주국 자리에 올랐을 만큼 장수의 자질이 있었다. 일이 급해지자 성안의 장졸들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 스스로 이끌고 나가면서 진승에게 말하였다.

“대왕, 진나라의 대군이 이르고 있다 하니 신(臣)이 먼저 나갑니다. 장함이 우리 땅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를 맞아 죽기로 싸워 그 기세를 꺾어 놓겠습니다. 그사이 대왕께서는 다시 널리 장졸들을 모아 신의 뒤를 받쳐 주십시오. 듣기로 지금 조정에서는 장하(張賀)가 가장 뛰어난 장수감이라 하니 그를 앞세우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장졸들을 휘몰아 진현 성밖 오십리 되는 곳에 진을 쳤다.

무인지경 밀고들 듯 장졸들을 휘몰아 진현으로 달려가던 장함은 그런 채사의 군사들을 보자 은근히 놀랐다. 이제 인근에서는 도와줄 세력도 없고 진왕의 군사도 다 흩어져 가서 숨통만 죄면 진현은 쉽게 떨어질 줄 알았는데 뜻밖의 대군으로 맞서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싸우기에 좋은 지형을 골라 제법 정연한 진세를 벌이고 있었다.

“대군을 휘몰아 단숨에 짓밟아 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까지 잇따라 이겨온 뒤라 호기가 솟은 진나라 장수들이 장함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조용히 적진을 살피던 장함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전력(戰力)을 다 긁어모은 것이라 그런지 저들의 기세가 여간 날카롭지 않다. 게다가 뒤가 막힌 땅을 골라 진세를 벌인 것이 죽기를 각오한 군사들이다. 함부로 들이치지 말고 우리도 지키기 좋은 곳을 골라 진채를 세워라.”

그리고 탐마(探馬)를 풀어 앞뒤 사정을 살펴보게 했다. 오래잖아 풀어놓은 탐마들이 돌아와 알렸다.

“군사를 이끌고 나온 장수는 상주국 채사이고 그가 이끈 군사는 진현에 남아있는 장졸 모두라고 합니다. 또 성안에서는 장하라는 장수가 인근 고을에 흩어져 있던 군사들을 불러들이고 새로 장정들을 뽑아 군세를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장하는 싸울 채비가 갖춰지는 대로 성을 나와 채사와 더불어 기각지세(기角之勢)를 이루어 성을 지키면서 구원이 오기를 기다릴 심산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장함의 얼굴이 흐려졌다.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장수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진승에게도 영 장수가 없지는 않구나. 일이 그렇게 되면 힘든 싸움이 된다. 희생이 늘더라도 기작지세를 이루기 전에 하나씩 떼어 쳐부수는 수밖에 없다. 오늘 밤 채사를 친다!”

거기서 장함이 함곡관을 나온 이래 가장 힘든 싸움이 한바탕 벌어졌다. 채사는 야습에 대비하고 있었으나 덮친 장함의 군사들이 워낙 대군이었다. 이십만이 넘는 대군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수레바퀴 굴리듯 번갈아 밀고 드니 3만 남짓한 채사의 군사들이 견뎌낼 수 없었다. 날이 새기도 전에 채사의 진채는 잿더미가 되고 상주국 채사도 군사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그 싸움에서 장함의 군대가 입은 손실도 적지 않았다. 거기다가 밤새 싸우느라 살아남은 군사들도 몹시 지쳐 무리하게 몰아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날 하루를 푹 쉬게 한 뒤에야 다시 진현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 사이 진왕과 장하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낸 힘으로 적지 않은 군사를 모았다. 하지만 상주국 채사가 이끌고 간 군대가 이미 싸움에 지고 채사도 죽었다는 소식이 오자 성을 나가는 대신 곡식을 거둬들이고 성벽을 고쳐 농성(籠城)을 준비했다. 그때 질현 사람 오봉(伍逢)이 진왕에게 말했다.

“적은 이십만 대군이요, 진현의 성은 좁고 성벽은 얇습니다. 에워싸여 싸우다가 성이 깨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오도가도 못하는 낭패를 당할까 두렵습니다. 차라리 들판에서 크게 싸워보고 뜻 같지 못하면 몸을 빼내 뒷날을 기약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도 그럴듯한 말이었다. 이에 진왕은 장하로 하여금 진현 서쪽의 들판에 진세를 벌이게 하고 자신도 싸움을 독려한다는 명목으로 함께 나와 장함의 군사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래잖아 장함의 대군이 이르러 양쪽 모두가 죽을 힘을 다한 싸움이 다시 한번 진현 서쪽 벌판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병세가 약한 데다 구원병조차 없는 진왕 쪽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진채는 뭉그러지고 장수인 장하마저 어지럽게 몰리는 군졸들 사이에서 죽고 말았다.

좌우의 보살핌으로 간신히 몸을 빼낸 진왕은 멀리 여음(汝陰)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장함은 그런 진왕에게 숨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한 갈래 날랜 군사를 보내 급히 뒤쫓게 했다.

이에 진왕은 흩어진 장졸들을 수습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수레를 하성보(下城父)로 몰게 했다. 예전에 부장(部將)으로 있던 장수 하나가 그곳에서 약간의 세력을 모아 놓고 기다린다는 풍문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하성보에 이르러보니 헛소문이라 맥없이 수레를 돌리는데 진군의 추격은 다급하기만 했다.

그때 진왕의 수레를 몰던 것은 장고(張賈)란 자였다. 시골 현청(縣廳)에서 어자(御者·마부) 노릇을 하다가 진왕을 따라 나서 장초(張楚)의 태복(太僕)에까지 오르게 되었으나 심지가 불량하였다. 진왕이 점점 궁해지고 지키는 군사도 줄어들자 슬며시 마음이 달라졌다. 졸개 하나와 짜고 진왕을 죽여 팔자를 고칠 궁리를 했다.

그 날 밤 장고는 온종일 쫓기느라 지친 진왕이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가만히 다가가 찔러 죽였다. 그리고 그 목을 잘라 수레에 싣고 진나라 진채로 달려가 항복하고 말았다.

장고의 투항을 받은 진나라 장수는 장고와 진왕의 목을 장함이 있는 진현으로 보냈다. 진왕의 목을 본 장함은 몹시 기뻐하며 장고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아울러 장고에게 약간의 군사를 딸려주며 진현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동쪽으로 또 다른 반란세력을 찾아 떠났다.

함양에서 불어온 역풍(逆風)은 일견 대택(大澤)에서 인 회오리를 가볍게 잠재워버린 듯했다. 장함도 진승을 죽임으로써 관동의 큰 불길은 잡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대택의 회오리가 불어 일으킨 관동의 불씨를 모조리 끈 것은 아니었다.

한때 진왕 곁에서 시중들다 장군이 된 여신(呂臣)이란 사람이 있었다. 진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창두군(蒼頭軍)을 조직해 신양(新陽)에서 일어났다. 창두(蒼頭)란 원래 사가(私家)의 노비를 이르는 말이었으나 여신의 창두군은 문자 그대로 푸른 수건으로 머리를 싸맨 군대를 말한다.

여신은 진왕의 원수를 갚는다며 창두군을 이끌고 진현으로 쳐들어 갔다. 장고가 장함에게서 얻은 약간의 진나라 군사들과 함께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당해낼 수가 없었다. 끝내 성은 떨어지고 장고는 창두군들에게 난도질당해 죽었다.

여신은 진왕의 머리를 찾고 또 하성보에 있는 몸통도 가져다 이은 뒤에 성대하게 장례를치렀다. 왕후(王侯)를 장사지내는 예로 탕현(탕縣)에 묻고 더하여 애상(哀傷)의 뜻이 있는 은왕(隱王)이란 시호(諡號)까지 바쳤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함양에서 불어온 장함이란 역풍은 거세게 중원을 휩쓸고 있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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