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세상/Go! 촬영 현장]'장화, 홍련'

  • 입력 2003년 2월 18일 17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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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화, 홍련’의 제작현장. 한 치의 비뚤어짐 없이 반듯하게 정돈된 고풍스런 가구들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사진제공 영화사 봄
영화 ‘장화, 홍련’의 제작현장. 한 치의 비뚤어짐 없이 반듯하게 정돈된 고풍스런 가구들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사진제공 영화사 봄
● “멀쩡한 사람도 여기 오면 다 이상해”

오전 9시반∼11시반. 이상한 집을 찾아가는 길부터 이상했다. 김지운 감독의 가족괴담 ‘장화, 홍련’ 촬영 현장을 보러 경기 양수리 종합촬영소 세트에 가던 날. 라디오에서는 서울 경기지역에 안개주의보가 내렸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초행도 아닌데 익숙했던 표지판들이 보이지 않았다. 팔당대교를 건너가다 보니 서울로 되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넉넉잡고 1시간이면 갈 길을 2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더니 ‘장화, 홍련’의 프로듀서 김영씨가 웃으며 말한다.

“귀신들린 촬영장이라고 하던데 정말이네. 멀쩡하던 사람들도 여기 오면 다 이상해져서 돌아간다잖아요.”

●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

고대소설 ‘장화홍련전’을 현대에 복원하는 영화 ‘장화, 홍련’은 두 자매와 아버지, 새엄마가 귀신들린 외딴 집에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기괴한 일들과 서서히 벗겨지는 가족의 비밀을 그린 공포영화다.

집 자체가 공포를 자아내는 ‘배우’이고, 전체의 80%를 세트에서 촬영하는 터라 세트에 쏟는 정성이 대단하다. 이날 찾은 세트장은 둘째 수연의 방. 앤틱 가구 위에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정교하게 배열돼 있다. 낡음과 청결함이 묘하게 뒤섞인 방의 분위기는 뭔가 불길한 일이 곧 벌어질 듯한 느낌을 준다.

도착했을 때 촬영 중이던 장면이 끝나자 20여명의 스태프들이 방안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다음 장면 촬영 때 벽 쪽에 배치돼 있던 수연의 침대 옆에 카메라가 들어가야 하므로 침대를 약간 옮기고 벽을 뚫느라 부산하다.

천장은 뻥 뚫린 채 올리브 그린색의 천이 덮여 있다. 이는 조명기 앞에 얇은 막을 쳐 앰비언스(Ambiance) 효과를 내기 위한 것. 빛의 세기를 조절하기 위해 사용되는 보조 방식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주 조명으로 쓰인다.

“모든 세트에 이 조명을 쓰는 영화는 우리가 처음이에요. 다른 조명은 인물의 얼굴에 빛이 너무 강하게 떨어지는데, 아름다우면서도 공포스러운 오브제를 촬영하려면 소프트하게 떨어지는 조명이 필요해서 이 방식을 써봤어요.” (김지운 감독)

카메라와 연결된 모니터 앞에는 김 감독이 직접 그린 16컷짜리 콘티가 붙어 있다. 오늘 촬영할 장면들의 이미지를 간단하게 그린 스케치다. 코믹한 톤의 콘티 그림 끝에 잡지 만화처럼 ‘다음 호에 계속’이라고 써놓은 것을 보고 웃다가 물었다.

―김지운 감독 영화라면 관객들이 재미있을 거라고 기대할텐데, 이 영화는 안웃겨요?

“안웃겨요. 뭐…, 비웃을 수는 있겠죠(웃음).”

촬영 현장에는 여성인력이 별로 없다더니만, 이 촬영장에는 유난히 여자 스태프가 많다. 프로듀서, 조감독, 제작실장이 모두 여자다.

사다리를 옮기던 한 여자 스태프는 “오늘 조명 팀에 여자 2명이 실습을 나온다며?”하며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 “1분3초 장면에 한시간 찍고 또 찍고”

오후 1시40분. 현장이 준비되자 계모 역을 맡은 염정아가 분장실에서 나왔다. 소설 ‘장화홍련전’에는 계모가 추녀로 묘사돼 있지만, 영화 ‘장화, 홍련’에서는 젊고 아름다운 새엄마다. 김 감독은 “젊고 예민한 새엄마가 두 자녀를 위압하는 구도”가 필요해 염정아를 캐스팅했다고 한다.

이번 촬영분량은 가족사진을 찢어버린 둘째 수연(문근영)을 새엄마가 추궁하는 장면. 대사는 침대에 누워있는 문근영에게 염정아가 “일어나. 내려와. 안내려와?”하고 윽박지르는 것이 전부다.

조감독이 “조용!” 하고 현장을 정리한 뒤 김 감독이 낮은 목소리로 “레디” “카메라” “액션”을 잇따라 부른다. 같은 장면을 3번이나 촬영했지만 원하는 ‘그림’이 잡히지 않는 눈치다.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김감독이 어깨에 수건을 대고 직접 카메라를 맸다. “핸드헬드(들고찍기) 카메라는 재미있어요. 한 사람이 너무 오래 매면 어깨가 아프니까 나눠서 하기도 하고.” 김감독이 직접 2번을 촬영했는데도 원하는 장면을 얻지 못했다. 새엄마가 침대 옆에 서서 내려다보는 구도라, 두 사람을 한 화면에 잡기가 난감한 모양이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의논하던 촬영기사가 “침대를 높일까요?”하고 묻는다.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고심하던 김 감독이 직접 카메라를 매고 3번의 추가 촬영을 마친 끝에 “오케이”를 불렀다. 감독이 문근영을 토닥거려 주는 사이, 사다리와 망치를 든 스태프들이 다시 비좁은 방안으로 몰려들어갔다.

6월 극장에서 관객들이 보게 될 영화 중 1분3초의 장면을 뽑아내는 데 걸린 시간은 1시간 남짓. 영화 촬영장은 숨가쁘게 돌아가기보다 그렇게 기다리고 인내하는 곳이다.

촬영 장면을 모니터하고 있는 김지운 감독.
사진제공 영화사 봄

▼감독 김지운, 농담 유머 걷고 ‘공포’속으로▼

‘장화, 홍련’은 ‘조용한 가족’ ‘반칙왕’의 김지운 감독이 유머와 농담기를 거둬내고 만드는 공포영화다. 이전 영화들로 코미디 장르를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을 듣는 그에게 ‘장화, 홍련’은 새로운 도전인 셈.

“원전이 워낙 재미있어서 흥미진진하고 엽기적인 영화의 소재로 훌륭하다고 생각했어요. 공포의 순간을 현실이 아닌 대체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공포영화의 매력이기도 해요. 일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감정의 강화된 순간만을 뽑아내야 하니까 감독으로서는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장르죠.”

그가 스스로 명명한 ‘장화, 홍련’의 장르는 ‘고딕 호러’다. 고딕 패션, 건축 양식의 이미지처럼 중심과 무게감이 있는 영화라는 뜻에서다. ‘권선징악’이 주제인 원전과 달리 이 영화에서 모든 인물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나’하는 막연한 원망과 함께 스스로를 질책하기도 하잖아요. 성장에 대한 공포, 타인에 대한 경계심에 사로잡힌 소녀들이나, 완벽한 가족에 집착하는 새엄마나 선과 악으로 확연하게 구분되지는 않는 거죠.”

그에게 세트 촬영은 이번이 처음. “현장이 조용한 편”이라고 하자 “남들이 도서관 같다고들 해요. 근데 예전에 ‘반칙왕’에서 레슬링 장면 찍을 때 엑스트라가 600명 있었는데도 조용했어요” 하면서 웃는다.

“현장에서는 ‘창작’에 대한 고민보다 매순간 뭘 결정해야 하는 일이 힘들어요. 오늘 이 옷 입을까, 저 옷 입을까 하는 고민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감독은 매순간 결정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하니까요. 그게 어렵죠.”

양수리 종합촬영소=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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