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二. 바람아 불어라

  • 입력 2003년 1월 30일 17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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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그늘(2)

몽의가 죽자 다음은 몽염 차례였다. 조고의 꼬드김에 이세황제 호해는 다시 몽염에게 죽음을 명하는 글을 내리고 덧붙여 말하였다.

<경의 잘못 또한 적지 않으나, 더한 것은 경의 아우가 저지른 큰 죄이다. 법대로 하면 형제로서 그 죄에 연루된 것만으로도 이미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양주의 감옥에서 행여나 하고 기다리던 몽염은 마른날에 날벼락 같은 그 말에 사신을 잡고 말했다.

“신(臣)의 집안은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진나라를 위해 싸워 공을 세운 지 삼대가 됩니다. 이제 신은 비록 죄수의 몸으로 갇혀있으나, 한때는 삼십만 대군을 거느린 장수로서 진나라에 반역하기에도 넉넉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신이 의리를 지켜 이렇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조상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아서이며, 선제(先帝)께서 끼치신 은덕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옛적에 주공 단(周公 旦)은 조카인 어린 성왕(成王)을 도와 주나라를 일으켜 세웠으나, 반역을 꾀한다는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멀리 초나라로 달아나야 했습니다. 뒷날 기부(記府· 기록을 보관하는 창고)를 살피다가 거기 간직되어 있는 주공 단의 글을 읽어보고 자신이 속은 것을 안 성왕은 그 간신배를 죽이고 주공 단을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주서(周書)’에 ‘반드시 여러 곳에 묻고, 거듭 살펴 행한다’는 구절을 남겼습니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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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신의 집안은 대대로 두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으나 일이 이렇게 되고만 것은 반드시 반역을 꾀하는 간신이 있어 저희를 모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폐하를 잘못 이끌어 안으로 군주를 욕보이려 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무릇 성왕은 한번 일을 그르쳤으되, 잘못을 고쳐 끝내는 창성(昌盛)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걸(桀)과 주(紂)는 관용봉(關龍逢)과 비간(比干) 같은 충신을 죽이고도 뉘우치지 않았기에 몸은 죽음에 이르고 나라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감히 ‘잘못은 바로잡아야 하며, 간언(諫言)을 들으면 깨달아야 하고, 두루 여러 곳에 묻고 거듭 살펴 행하는 것이 어진 임금의 도리이다’라는 말씀을 올립니다. 신이 이같이 아뢰는 것은 결코 허물을 면해보고자 함이 아니라, 바른 간언을 올린 뒤에 죽고자 할 따름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가련한 뭇 백성들을 위해 떳떳한 도리로 천하를 다스리도록 하옵소서.”

그리고 자신의 말을 이세황제에게 전해주기를 빌었으나 소용없었다. 이미 조고에게서 거듭 다짐을 받고 온 사자가 차갑게 잘라 말했다.

“나는 명령을 받고 형을 집행할 따름이니, 장군의 말씀을 폐하께 전해 올릴 길이 없소.”

이에 몽염은 길게 한숨짓고 말하였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죄도 없이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한참이나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문득 탄식처럼 말하였다.

“나의 죄는 참으로 죽어 마땅하다. 임조(臨조)에서 공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만리가 넘도록 장성(長城)을 쌓았으니 그 동안에 끊어 놓은 지혈(地穴) 지맥(地脈)이 얼마이겠는가!”

몽염이 그 말을 끝으로 약을 마시고 죽자, 함양에서 그 일을 전해들은 조고는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이세황제 호해에게는 그게 시작이었다. 아비를 흉내 내어 동쪽을 순수하며 바위와 돌에 돼먹지도 않은 글을 어지럽게 새기고 돌아온 호해가 가만히 조고를 불러 말했다.

“대저 사람이 태어나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비유하자면 여섯 마리의 준마가 끄는 수레가 벌어진 틈 사이를 달려 지나가는 것과 같소. 짐은 이미 황제로 천하에 군림하게 되었으되, 귀와 눈으로 좋은 것을 느끼고 싶고, 마음이 즐거운 바를 다하며, 종묘를 안정시키고 만백성을 기쁘게 하며, 천하를 오래도록 지키면서 천수(天壽)를 마치고 싶소. 그런데 대신들은 기꺼이 복종하려 하지 않고, 관리들은 아직도 세력이 강대하며, 공자들은 기어이 나와 제위를 다투려 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뒷사람들은 흔히 진(秦) 이세황제 시절의 어지러운 정치를 조고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차분히 살피면 그같은 어지러움을 이끌어낸 데는 이세황제 호해의 특이한 개성도 한몫을 했다. 가만히 앉아 절대권력을 승계한 자들이 그 절대권력의 무게에 짓눌려 드러내는 인격의 왜곡과 파탄으로, 호해는 이미 그것을 시황제를 장사지내는 과정에서 허영과 잔인함으로 잘 드러낸 바 있었다. 어쩌면 그날의 물음도 아직 넉넉히 채워지지 못한. 그 허영과 잔인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고가 때를 놓치지 않고 속살거렸다.

“신(臣)이 도끼 아래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히 아룁니다. 대저 사구(砂丘·진시황이 죽은 곳)에서의 모의는 여러 공자들과 대신들이 모두 의심하고 있는데, 그 공자들은 모두 폐하의 형들이며 대신들은 선제께서 뽑아 썼던 인재들입니다. 지난날 그 공자들은 스스로 폐하보다 제위에 가까이 있다고 여기며 살아왔고, 대신들은 세상에 명망을 떨친 귀인들로 여러 대 이 나라에 공을 쌓아왔다 자랑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폐하께서 제위에 오르시어 비천한 신을 치켜세우시고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하시어 조정안의 큰일을 맡기시니, 공자와 대신들의 속이 어떠하겠습니까?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못마땅히 여겨 따르지 아니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문치(文治)로 다스릴 때가 아니라 무력으로 천하 대세를 결단할 때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망설이지 마시고 유리한 시세(時勢)를 살려 맞게 쓰시면, 공자와 대신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입니다. 법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시어, 죄가 크면 저잣거리에 끌어내어 여럿 앞에서 사지를 찢게 하시고 일족도 연좌(連坐)하여 처단하시며, 죄가 적어도 손발이 잘리고 일족이 모두 갇히게 되는 벌을 내리도록 하소서. 선제 때부터의 옛 대신들을 모두 죽여 없애시고, 골육을 멀리하시며 공자라도 폐하께 거역하는 이들은 서슴없이 목 베소서. 가난한 자를 부유하게 하시고 천한 자를 존귀하게 하시며 멀리 있는 자를 가까이 부르소서.

이렇게 하시면 감춰져 있던 덕이 드러나고 숨어있던 민심이 몰려, 해로운 것이 사라지게 되고 간사한 꾀가 쓰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천하가 모두 폐하의 두터운 은덕을 입어, 폐하께서는 더 애쓰지 않으셔도 베개를 높이 하고 주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세황제는 기다렸다는 듯 그 말을 따라 법을 바꾸고 걸려든 공자와 대신들을 조고의 손에 맡겨 처벌하게 하였다.

공자 열두 명이 함양의 저잣거리에서 끔찍한 형을 받아 죽었으며, 공주 열 명도 두현(杜縣)에서 사지가 찢겨 죽었다. 공자 장려(將閭)의 형제 세 사람은 내궁에 감금되어 있다가 죽었는데, 가장 나중에 처형되었다. 이세 황제가 사자를 보내 자신의 말을 전하게 하였다.

“그대는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않았으므로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되기에 형리를 보내 집행하노라.”

그 말에 장려가 빌었다.

“궁중의 의식에서 나는 이제까지 빈찬(賓贊·의례를 담당하는 관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고, 조정에 들어서는 한번도 예를 어긴 적이 없었으며, 황제의 명을 받들어 사신을 응대할 때도 실언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죽더라도 죄명이나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

“나는 죄명을 논하는데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다만 조서를 받들어 삼가 형을 집행할 따름입니다.”

사자가 죄지은 사람 마냥 기어드는 목소리로 받았다.

“하늘이시여, 나는 죄가 없습니다!”

장려는 하늘을 올려보며 처절한 목소리로 그렇게 세 번 외친 뒤에 칼을 꺼내 스스로 목을 찔렀다. 그 형제들도 뒤따라 목을 찔러 자결했다.

골육인 공자와 공주들이 그 지경이니 대신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구경(九卿·조정의 상급직)에서 삼랑(三郞·中郞 外郞 散郞으로 조정의 하급직을 이름)에 이르기까지 조고가 쳐놓은 법망을 벗어난 이는 많지 못했고, 군현의 수위(守尉)들 중에도 목숨을 잃은 자가 많았다.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고 일족도 죄에 따라 벌을 나누어 받았다.

겉보기에 그 모든 일은 조고를 내세워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뒤에서 주도하는 것은 오히려 이세황제 호해 쪽이었다. 그걸 잘 보여주는 일이 공자 고(高)의 죽음이었다.

조고가 쳐놓은 법망에 걸려든 공자 고는 도망쳐 목숨이라도 건지려다가, 죄가 가족에게 미치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상서를 올렸다.

<선제께서 살아 계실 때 신이 궁궐에 들면 음식을 하사하셨고 궁궐을 나서면 수레를 타게 하셨습니다. 어부(御府·황제의 의복을 관장하는 부서)의 옷을 제게 내리셨으며, 마구간의 좋은 말까지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선제께서 붕어하셨을 때 신 또한 선제를 따라 죽어야 했으나 그러하지 못했으니 이는 아들 된 자로서 불효이고 신하된 자로서 불충입니다. 충효를 아울러 갖추지 못한 자는 세상에 나설 면목이 없으니 이제나마 신은 선제를 따라 죽고자 합니다. 신이 죽거든 부디 선제께서 잠들어 계시는 여산(驪山)기슭에 묻힐 수 있게 해주옵소서. 오직 폐하께서 가엾게 여겨주심만도 크나큰 은덕으로 알겠습니다.>

그 글을 읽어본 이세황제는 대단히 기뻐하며 조고를 불러 보여주었다.

“어떻소? 이만하면 저들이 앞뒤를 헤아릴 겨를이 없을 만큼 몰아댄 게 되겠소? 짐이 베개를 높이 하고 자도 되겠는가, 이 말이오.”

호해가 자랑스레 묻자 조고가 음침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신하된 자들이 죽음이 두려워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었으니 무슨 수로 변란을 꾸밀 수가 있겠습니까?”

그 말에 호해는 더욱 흡족해하며 공자 고가 여산 기슭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고 십만 전(錢)을 내려 그를 장사지내주게 하였다.

나라 안팎을 피로 적시다시피 하며 자신의 정통성과 정당성에 도전하는 세력을 잔혹하게 쓸어버린 이세황제 호해는 다시 거창하게 짓고 세우는 일로 허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두 가지 일이 백성들에게 특히 재앙이 되었는데, 그 하나가 시황제가 짓다만 아방궁(阿房宮)을 마저 짓게 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뒷날 ‘병마용(兵馬甬)’으로 알려진 지하군단(地下軍團)의 제작과 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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