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二. 바람아 불어라…(12)

  • 입력 2003년 1월 23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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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그늘(1)

시황제 시절 함양 부근 이 백 리 안에는 이 백 일곱 개의 궁궐이 있고, 그 궁궐들은 모두 구름다리와 용도(甬道·흙담을 두른 길)로 이어져 있었다. 황제는 그 궁궐들을 가만히 옮겨 다니며 자신이 어디에 묵고 있는지 알 수 없게 하였으며, 그걸 함부로 밝히는 자에게는 죽음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이나 내시들[시어자]밖에 드나들 수가 없어 금중(禁中)이라 불리었는데, 이세(二世)황제 호해(胡亥)도 그런 아비를 본떴다.

진(秦) 이세 황제 2년 시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호해는 위수 남쪽의 장신궁(長信宮)을 금중으로 삼아 머물고 있었다. 뒷날과는 달리, 그래도 중대한 국사는 아직 황제와 대신들과 얼굴을 마주보며 논의하던 때의 일이었다.

그날 장신궁에서 낭중령부(郎中令府)로 쓰고 있는 전각 한 깊숙한 방안에는 낭중령 조고(趙高)와 그 아우 조성(趙成)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그래, 자세히 알아보았느냐?”

조고가 환관 특유의 높고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낮춰 아우에게 물었다. 조성은 어디를 바삐 돌아치다 왔는지 아직 숨결도 고르지 않았다. 길게 숨을 내뿜어 한번 더 숨결을 고른 뒤에 물음을 받았다.

“예. 제가 직접 희수(戱水)근처로 가서 보고 들었을 뿐만 아니라, 날래고 눈치 빠른 사람을 적도들 틈에 몇 풀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래, 적도들의 병세(兵勢)는 어떠했고 장수는 누구더냐?”

“적도들은 스스로 몇십 만이라 떠드나, 그저 먹을 것이나 얻고자 따르는 무리가 적잖이 섞여 있어, 군사라 이름할 수 있는 자들은 십만을 넘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거기다가 병장기가 허술하고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농투성이가 태반이었지만, 그 기세만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그들을 이끄는 장수는 이름을 주문(周文)이라고도 하고 주장(周章)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력만 들어도 만만찮은 자임을 알만 했습니다. 그자는 원래 진(陳) 땅 사람으로 일찍이 항연(項燕) 막하에서 시일(視日·군대를 따라 다니며 천문을 살피고 길흉을 점치던 사람. 日者라고도 한다)을 지냈으며, 한 때는 춘신군(春信君·楚나라의 令尹을 지낸 사람으로 食客 3천을 거느리고 戰國말기 한때를 주무른 풍운아)을 모신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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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이 역도의 우두머리 진승의 눈에 들어 장군인(將軍印)을 받고 감히 진나라를 치겠다고 나설 때 그가 이끈 군사는 채 만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서쪽으로 오는 도중에 끌어 모은 군사가 십만이 넘고, 장수 수십 명에 전거(戰車)가 천승(千乘)에 이른다 하니, 어찌 가볍게 볼 수 있겠습니까?“

조성 또한 환관이라 마음이 격해지자 절로 목소리가 높아져 안달부리는 아낙네처럼 쨍쨍거렸다. 그러나 조고는 여전히 차고 가라앉은 눈길로 그런 아우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다른 세상 소식도 새로 들은 것이 있으면 말해보아라”

“지금 시끄러운 것은 대택(大澤)이나 강남만이 아닙니다. 이미 함곡관 동쪽은 우리 진나라의 천하가 아닌 듯합니다.”

“그건 나도 들어 알고 있다.”

“그런데도 형님은 계속 구경만 하실 겁니까? 진나라가 없으면 황제도 없고, 황제가 없으면 위세 좋은 낭중령도 없습니다. ”

그런 조성의 말투에는 어딘가 형인 조고를 두려워하면서도 나무라는 듯한 데가 있었다. 조고가 잠시 조용한 물처럼 앉았다가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알았다. 나가 보아라.”

그리고는 말없이 방을 나가는 아우에게 다시 생각난 듯 덧붙였다.

“소부(少府·九卿의 하나로 황실 재정담당관) 장함(章邯)을 찾아 오라 일러라”

“소부 장함을…?”

그렇게 되묻는 조성의 눈이 궁금함으로 번쩍했다. 그러나 함부로 되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형의 성품을 잘 아는지 굳이 그 까닭을 알아보려 하지 않고 내쳐 방을 나갔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지요.”

조고는 그런 아우의 말을 귓가로 흘러들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더는 밖의 일을 미룰 수가 없다. 아직 궁궐 안의 일이 모두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이쯤에서 손쓰지 않으면 애써 쌓아올린 조정의 권세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아우의 말대로 진나라와 황제가 없으면 이 조고도 없다.)

그러면서 얇은 입술을 지긋이 깨무는 그의 머릿속에는 지난 일년 남짓의 숨가쁜 세월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승상 이사(李斯)를 꼬드겨 호해를 이세 황제로 세우고 시황제의 장자인 부소를 죽게 한 조고가 한동안 가장 힘을 쏟은 일은 몽염(蒙恬)과 몽의(蒙毅) 형제를 죽이는 일이었다.

몽씨는 원래 제(齊)나라에 살았으나 몽염의 조부 몽오(蒙鰲)가 진나라에 와서 장군이 된 뒤로 대를 이어 진나라가 알아주는 장군가가 되었다. 몽염은 장군 왕전(王剪)과 함게 초나라를 쳐 없애고, 그 장수 항연(項燕)을 죽인 일로 특히 이름을 떨쳤다. 또 흉노를 멀리 내쫓고만리 장성을 쌓아 시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몽염의 아우 몽의도 시황제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상경(上卿)에 이르렀다. 시황제가 궁궐 밖으로 나갈 때는 수레를 함께 탔으며 돌아와서는 언제나 곁에서 모셨다. 몽염은 장군으로 밖을 지키고 몽의는 대신으로 안에서 충성을 다하니 누구도 그들 몽씨 일가와 감히 다투려 하지 않았다.

한번은 조고가 큰 죄를 지었는데 시황제는 몽의에게 그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몽의는 법에 따라 처결하였으나 그래도 베풀 수 있는 인정은 다 베풀었다. 죽음을 면하게 하고 환적(宦籍)에서 내치는 것으로 그쳤는데, 속 좁은 조고는 법을 따른 몽의에게 오히려 원한을 품었다.

시황제의 유서를 위조하여 호해를 황제로 세운 조고는 먼저 장군으로서 대군을 이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태자 부소까지 등에 업고있는 몽염부터 죽이려 했다. 이사의 가신(家臣)을 사자로 삼아 상군(上郡)의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는 시황제의 거짓 조서를 전하게 했다. 부소는 시황제가 명한 대로 자살하였으나, 몽염은 조서를 의심하여 죽기를 마다했다. 이에 사자는 몽염을 양주(陽周)의 옥에 가두고 돌아가 호해와 조고에게 그대로 알렸다.

황제가 된 호해는 부소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몽염을 살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조고는 몽염이 살아 그 아우와 더불어 다시 권세를 얻게 되는 게 두려웠다. 가만히 호해를 찾아가 말했다.

“선제(先帝·시황제)께서는 진작부터 현명한 이를 태자로 세우시려고 하였으나 몽의가 가운데 들어서서 안된다고 말렸습니다. 폐하께서 현명하신 것을 알고도 오래도록 태자로 세우는 것을 막았으니, 이는 불충(不忠)이며 군주를 미혹시킨 일입니다. 몽의의 그같은 짓은 어리석은 신이 헤아리기에는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그렇게 모함하여 몽의도 대현(代縣) 옥에 가두게 했다. 그리고 밤낮으로 이세 황제에게 몽씨 형제를 헐뜯고 죄과를 들춰내 탄핵하였다. 호해의 조카 되는 자영(子영)이 몽씨 형제를 구하러 나섰다.

“옛적 조나라 임금 천(遷)은 어진 신하 이목(李牧)을 죽이고 안추(顔聚)를 등용하였으며. 연나라 임금 희(喜)는 오래된 신하들 모르게 형가(荊軻)의 계책을 서서 우리 진나라와의 약조를 저버렸으며, 제나라 임금 건(建)은 윗대의 충신들을 죽이고 후승(后勝)의 말을 따랐습니다. 이 세 임금은 옛것을 바꾸었다가 각기 나라를 잃었으며, 재앙이 그 몸에까지 미쳤습니다. 지금 갇혀있는 몽씨는 우리 진나라의 큰 신하이며 모사(謀士)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하루아침에 이들을 버리려 하시니 결코 아니 될 일입니다.

신이 듣건대, 경솔한 생각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고, 혼자의 지혜로는 군주의 자리를 보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충신을 죽이고 믿지 못할 사람을 세운다면 이는 안으로는 뭇 신하들을 서로 믿지 못하게 하고, 밖으로는 전쟁을 치르는 군사들의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는 일이니 나라를 위해 적이 걱정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말렸으나 호해는 듣지 않았다. 먼저 사자를 대(代)땅으로 보내 자신의 말을 전하게 하였다.

<선제께서 나를 태자로 세우려 하실 적에 경은 나를 헐뜯으며 그 일을 막았소. 승상은 그와 같은 경의 불충(不忠)을 꾸짖으며 그 죄가 일족에게 미친다 하였으나, 짐은 차마 그리할 수가 없어 경에게만 죽음을 내리오. 아무쪼록 이 처분을 다행으로 여기고 경은 스스로 알아서 행하시오.>

몽의가 그 명에 대답해 말했다.

“신이 선제의 뜻을 몰랐다고 볼 수도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젊어서부터 벼슬하여 선제께서 승하하실 때까지 그 뜻에 순종하고 총애를 잃지 않았으니 어찌 선제의 뜻을 몰랐다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이 폐하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였을 수도 있으나, 오직 폐하만이 선제를 수행하여 천하를 두루 순행하였으니, 폐하께서 다른 여러 공자분들 보다 훨씬 뛰어남을 제가 어찌 몰랐겠습니까? 선제께서 폐하를 태자로 세우려 생각하신 지 여러 해 되었다면 신이 감히 무슨 말로 말릴 것이며, 어찌 감히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말을 꾸며서 죽음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제의 크고 빛나는 이름에 흠집이 될까 두려우니 폐하께서는 부디 깊이 헤아리시어 신이 올바른 죄명으로 죽게 해주십시오.

대체로 공을 이루고 제 몸도 온전히 보전해야 도리가 귀한 것이지, 형벌을 받고 죽게되면 도리도 끝입니다. 옛날에 진목공(秦穆公)께서는 세 사람의 어진 신하를 죽이시고 백리해(百里奚)에게도 죽음을 내리셨지만 모두 올바른 죄목은 아니었습니다. 또 소양왕(昭襄王)은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를 죽였으며, 초평왕(楚平王)은 오사(伍奢)를 죽였고, 오왕(吳王) 부차는 오자서를 죽였습니다. 이 네 임금은 모두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래서 천하가 그들을 꾸짖었으며 어질지 못한 임금으로 나쁘게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도리로 다스리는 이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무고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부디 굽어 살피시옵소서.”

하지만 사자는 이세황제의 뜻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같은 몽의의 말을 전해주려 하지 않았다. 스스로 죽어주기를 바라다 듣지 않자 사람을 시켜 몽의를 죽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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