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영호/먼저 약속 깬 쪽은 北이다

  • 입력 2002년 12월 13일 18시 31분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서’에 의해 동결시킨 핵시설들의 가동과 건설을 즉시 재개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10월초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의 방북 이후 촉발된 북한 핵 위기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북한은 제네바합의에 따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중유 공급 중단을 핵 동결 해제선언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번 핵 위기의 본질은 북한의 농축우라늄 핵 개발 시도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은 1999년부터 북한이 우라늄 농축에 필요한 다량의 특수알루미늄과 2000∼3000기의 원심분리기를 파키스탄으로부터 수입했다는 증거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에게 북한 미사일의 수입에 대한 대가로 핵 관련 시설들을 북한에 제공하지 말 것을 수차례에 걸쳐 요구한 것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核시설 재가동땐 제재 불가피▼

북한의 우라늄농축 핵무기 프로그램은 제네바 기본합의서, 핵확산금지조약,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 협정 및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기 때문에 한국 미국 일본 및 KEDO는 가시적이고 검증가능한 방법으로 북한에 새로운 핵무기 프로그램을 즉각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북한이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북한에 대한 중유 지원이 중단됐고, 기본합의서는 북한의 이번 선언으로 사실상 파기된 것으로 보인다.

만약 북한이 현재 수조에 보관 중인 8000여개의 폐연료봉에 대한 재처리를 시도하거나 그동안 중단되었던 50㎿와 200㎿ 원자로 건설을 재개하는 등 일련의 조치들을 취할 경우 북한의 신포지역에서 진행 중인 경수로 건설의 중단과 남한 인력의 철수는 중유 공급 중단에 이은 제2단계 조치로서 불가피할 것이다. 이처럼 일괄 타결되었던 사안들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북한이 새로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미국은 유엔을 통한 제재 등 북한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켜 나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새로운 핵 위기의 책임을 조지 W 부시 미행정부에 일방적으로 돌리고 있지만 설득력이 전혀 없어 보인다. 북한이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시점은 1999년이었는데 이때는 부시 행정부가 등장하기 이전일 뿐만 아니라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조차 나오지 않았던 시점이다. 10월25일 북한이 미국에 불가침선언을 제의하자 부시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불침공을 재천명함으로써 그 요구를 간접적으로 수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 동결 해제를 선언해 미국은 북한의 의도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한의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이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안보 문제에 대한 전략적 고려 없이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지원과 북한의 선의에만 의존했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오히려 한반도의 안보위기를 불러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제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정작 한반도의 평화정착에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처지가 되었다.

▼韓美日 공조로 대비 서둘러야▼

이번 핵 위기는 북한이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투명한 검증 절차를 밟아 폐기하고 제네바합의의 틀로 되돌아와서 영변의 핵시설들을 다시 동결하지 않는 한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북한은 켈리 차관보 방북시 시인했던 것을 이번 핵 동결 해제선언에서는 번복하는 등 최근 북한 지도부 내의 정책결정 과정은 과거와 달리 상당한 판단의 착오와 혼선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유사시의 대비책 마련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3국의 확고한 공조에 의한 대북한 억지체제의 구축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대통령선거가 1주일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 공조와 구체적 전략 방안의 모색은 차기 대통령 당선자의 과제로 넘겨지게 되었다. 그만큼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막판에 안보위기 극복 능력이 후보 선택의 중요한 기준의 하나로 떠올랐다.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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