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권장소비자價 믿는 그대 이름은 ‘봉’

  • 입력 2002년 12월 10일 18시 15분


지난해 최고 히트상품은 대만산 건강용품 ‘AB슬라이더’였다.

2001년 3월 홈쇼핑에서 이 제품을 팔았을 때 가격은 6만9000원. 하지만 이 해 9월에는 1만9000원에 거래됐다. 반년 사이 무려 5만원이나 떨어졌고 일찍 이 제품을 산 소비자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렇지만 너무 억울해 할 것도 없다. 상품 가격은 짧은 기간에도 수시로 변하기 마련이다. ‘일정 기간 비슷한 가격이 유지될 것’이라는 소비자들의 기대는 자주 배신당한다. 모든 상품이 ‘수요 공급의 균형’이라는 투명한 과정을 밟아 값이 매겨지는 것도 아니다.

가격에 대해 소비자는 어떤 오해를 하고 있을까. 또 유통업체들은 어떤 가격 전략을 세울까.

▽‘마음의 가격’을 아시나요〓“뭐가 이리 비싸.” 99년 1월1일로 담배 ‘디스(THIS)’가 갑당 1000원에서 1100원으로 100원 오르자 애연가들의 불만은 대단했다. 이후 6개월 동안 디스의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27.5%가 떨어졌다.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반면 96년 7월2일, 900원에서 1000원으로 올랐을 때 상황은 반대였다. 이후 6개월 동안 디스는 전년 동기에 비해 무려 34.4% 더 많이 팔렸다. 96, 99년 모두 디스는 담배시장의 1위 브랜드였다.

한국담배인삼공사 박원락(朴原洛) 과장은 “잔돈을 더 내야하는 만큼 성가셨고 담뱃값은 1000원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심리적 가격저항이 컸다”면서 “그 뒤에도 인상을 거듭해 디스의 값이 이제 1500원이 됐지만 그때처럼 저항이 크지는 않다”고 말했다.

시장에는 ‘어떤 상품은 어느 수준의 값’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감대가 있다. 제조업체들은 원자재값이 아무리 올라도 이보다 높은 가격을 매기기를 꺼린다. 식빵은 1500∼2000원, 껌은 500원을 넘을 수 없고, 구두는 15만원 안팎 등등.

베이커리업체 뚜레쥬르의 서근원(徐槿原) 마케팅팀 과장은 “어느 가격선을 넘으면 판매량이 급감한다”면서 “결국 그 가격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빵의 크기를 작게 하는 등 다른 방법을 동원해 원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심리적 마지노선을 넘는 것은 기술 혁신 등으로 새로운 기능이나 새로운 개념의 제품이 등장할 때다. 그나마도 절묘한 마케팅이 동반되지 않으면 좌절하는 수가 더 많다.

▽싸면 잘 팔리고 비쌀수록 품질이 좋다?〓당연한 듯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쌀수록 잘 팔리지 않는 제품이 많다. 너무 싸면 소비자들이 의심을 품기 시작하는 것. 이런 사례는 옷이나 명품에서 많이 발견된다.

여성 의류업체들은 30% 이상 세일하지 않는다. 이를 넘을 경우 판매량이 뚝 떨어진다. 신세계백화점 손문국(孫文國) 과장은 “10여년 동안 백화점과 여성정장 제조업체 사이에는 할인율을 30% 이내에서 한다는 묵계가 형성돼 왔다”면서 “너무 싸면 소비자가 떨이상품이거나 재고상품으로 짐작한다”고 말했다.

물론 비쌀수록 품질이 좋은 것만도 아니다. 가전제품을 전문 구매하는 한 대형 유통업체 바이어는 “모델번호가 다르고 값도 크게 차이 나는데, 알고 보면 문고리 형태만 달리하는 등 아주 미세한 부분만 다르게 만든 제품도 많다”고 말했다.

국내에는 이런 연구가 활발하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가격과 품질의 관계를 추적한 연구성과들이 있다. 마케팅 전문가인 영화회계법인의 김세중 회계사는 “캐나다 소비자단체가 수십 년 동안 1000개 가까운 물건의 판매가격과 제품 품질을 해마다 조사했더니 둘은 상관관계가 약간 있었을 뿐 그다지 밀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격이 곧 품질을 반영한다는 믿음 위에 만들어진 ‘물건을 모르면 값을 더 주라’는 속담과는 다른 결과인 셈이다.

▽권장소비자가(권소가)의 진실〓권소가는 제조업체가 임의로 정한 것으로 법적 근거가 없다. 때문에 일부 품목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품에서 이 가격은 부풀려 있을 때가 많다고 유통업체나 소비자단체 전문가들은 말한다. 소비자가 가격을 비교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가 왜곡된 것.

산업자원부는 99년 9월 이후 가격 왜곡이 심한 22개 품목(표 참조)에는 아예 권소가를 상품에 붙이지 말도록 규정했다. 그 가격의 절반 이하로 팔리는 상품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한국소비자보호원 손영호(孫榮鎬) 상품거래팀장은 “일부 품목을 빼곤 많은 상품에서 권소가는 시장에 존재하지 않는 허수를 적어 놓은 것”이라며 “마치 이것을 기준으로 할인을 많이 해주는 것처럼 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물건을 제대로 사는 요령은 없을까? 예나 지금이나 ‘발품을 파는 것’ 외에는 아직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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