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철용/거래소가 무슨 잘못을…

  • 입력 2002년 11월 20일 18시 11분


18일 증권거래소 홍보실은 하루종일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아침부터 전화통에 불이 났고 8명의 공보팀 직원들은 모두 분주했다.

한참 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던 공보팀장이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그가 임원과 함께 달려간 곳은 청와대.

청와대 실무자는 이날 조간신문에 일제히 ‘올 3·4분기 기업실적이 2·4분기에 비해 크게 악화했다’는 내용의 보도가 나간 배경을 따져 물었다고 한다.

“보도자료 외에 기자들의 요구에 따라 분석자료를 냈고 그 중 분석자료에 초점을 맞춰 기사를 쓴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준비해갔지만 ‘지금이 어느 때인줄 모르느냐’고 하는 데야 무슨 구차한 변명이 필요했겠는가.

같은 시간에 거래소와 코스닥 증권시장의 공시담당자도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재정경제부 담당 국장은 “보도자료의 톤에 대해 왜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느냐”, “긍정적인 부분을 강조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고 목청을 높였다.

이날 밤 각 언론사에는 거래소 홍보팀장 명의의 해명자료가 팩스로 전달됐다.

“올 3·4분기 기업실적은 작년 3·4분기와 비교할 때 순이익이 200% 남짓 증가하는 등 아주 좋았다. 2·4분기와 비교하면 계절적 요인이 감안되지 않아 실적이 과소평가될 우려가 있다.”

기업의 분기 실적을 ‘전년동기 대비’로 해야 할지, ‘전분기 대비’로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전년동기 대비로 보면 기업회계 관행, 계절적 요인 등을 감안할 수 있다. 반면 전분기 대비를 잣대로 하면 미시적인 경기 흐름에 대한 감(感)을 잡기가 쉽다.

따라서 ‘전년동기 대비’ 기준에 집착하는 청와대나 재경부의 입장에도 나름의 근거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년동기 대비로 된 보도자료 외에 전분기 대비로 작성한 분석자료를 언론에 내놓았다고 문제삼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처사일 뿐이다.

700개가 넘는 상장기업 실적을 분석하느라 이틀 밤을 꼬박 새운 민간기관 직원들을 훈계하는 것은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실무자들의 충정을 감안한다 해도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철용기자 경제부 lc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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