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진영/매수와 음모 판치는 정치

  • 입력 2002년 10월 15일 18시 26분


한국의 정치판이 음모 매수 폭로 사기 정치공작이 난무하는 곳이라는 것쯤은 한국인이라면 으레 짐작으로도 알고 있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의 깊은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이러한 한국인들에게조차도 매우 충격적이다.

▼검은 뒷거래 정말 있었나▼

우선 14일 일어난 일부터 생각해 보자. 1996년 총선 직전 청와대 부속실장이던 장학로씨의 축재비리를 폭로한 백모씨가 민주당을 상대로 ‘폭로보상금’ 잔액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백씨는 폭로 후 계속해서 돈을 요구했고, 99년 9월까지 800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백씨는 최근까지도 민주당에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가 계속 돈을 요구했으나 약속한 돈을 다 받지 못해 소송을 제기했다고 한다. 물론 민주당 관계자들은 이 일이 당 차원이 아니라 관련 인사 몇 명에 의해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명하고 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일깨워준다. 하나는 아직도 매수와 폭로가 한국에서 정치를 하는 주요 수단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정치가 혼란스러워 보여도 민주화와 정치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자위하던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충격적인 일이다. 다른 하나는 매수자와 매수를 당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주는 교훈이다. 매수자는 폭로가 가져올 정치적 이익을 계산했을 것이고, 매수를 당한 사람은 폭로에 대한 보상에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사이의 이해관계는 폭로를 전후로 크게 바뀔 수 있다. 폭로 후 매수자가 폭로 전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매수를 당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무기는 폭로가 매수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폭로함으로써 매수자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다. 매수자에게 주는 타격이 크면 클수록 매수를 당한 사람은 매수자에 대해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 매수를 통한 폭로 정치의 위험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논리는 최근 일어나고 있는 굵직한 사건들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백씨의 말에 따르면 이정연씨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한 김대업씨도 민주당에 돈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는 이 말의 사실 여부를 모른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뒷거래가 있었다면, 김씨는 또 하나의 무기를 가진 셈이다. 민주당을 협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온 국민이 귀가 따갑도록 들은 이 사건이 뒷거래를 통한 음모와 사기였다면 민주당이 받을 정치적 타격이 매우 클 것임은 자명하다.

한나라당이 제기한 남북정상회담 뒷거래설도 실로 엄청난 충격이다. 한나라당의 주장에 따르면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대출한 4000억원이 남북정상회담의 대가로 북한에 비밀리에 지원됐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대중 대통령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현 정부의 최대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대북정책이 뒷거래를 통해 추진된 것으로 평가절하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한나라당은 참으로 무책임한 정당으로서 국민의 멸시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이 사건은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김 대통령과 민주당은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북한이 뒷거래를 인정하는 입장을 표명할 경우 큰 타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도 결국 파멸뿐▼

음모와 사기, 뒷거래 정치가 위험한 이유는 물론 이것이 무엇보다도 한국정치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국민을 불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의 또 다른 위험은 이것이 당사자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비정상적 정치행위는 결국 스스로를 볼모로 잡히는 위험한 짓이다. 사실이 밝혀지기를 두려워하는 정치세력은 무슨 수를 쓰든지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것이다. 권력을 쥐고 있는 한 사실을 조작할 수도, 은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헛된 생각이다.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고, 감추려고 할수록 더 큰 거짓말을 계속해야 할 뿐이다.

따라서 한국정치 발전과 국민을 위한다는 거창한 명분은 접어두고라도 최소한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음모와 매수, 폭로 등의 비열한 정치행위는 중단돼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막는 길이기 때문이다.

정진영 경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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