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1달러에서 4천억원까지

  • 입력 2002년 10월 11일 18시 23분


청와대가 외통수에 걸렸다. 남북정상회담 뒷거래용으로 4000억원이 부당대출됐다는 주장에 옴짝달싹 못할 처지가 된 것이다. 현대상선 계좌를 추적하면 단박에 밝혀질 일이지만 그걸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으니 난처하기만 하다.

정부가 이런 입장이 된 것은 기본적으로 대북정책과 관련해 그동안 못 믿을 일들을 너무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의 “북한에 단돈 1달러도 주지 않았다”고 한 국회답변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느낌이다. 박 실장이 그렇게 당당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지갑에서는 단돈 1달러도 북한에 준 적이 없기 때문일지 모른다. 단지 정부가 다른 사람 주머니에 있는 것을 대신 북한에 주도록 했는지에 대해서는 국회의원 누구도 묻지 않았으니까 굳이 말할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北지원 나서다 골병든 재벌▼

지금의 남북관계가 ‘경제협력’을 바탕으로 응고되고 형상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상식이다.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떼 몰고 북한을 찾은 이후 이 기업이 북한에 제공한 물자와 자금의 규모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정권핵심 일부를 빼면 별로 없을 것이다. 또 거기에 들어간 자금이 회사 돈인지 개인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현대그룹 최고 경영진 극소수 외에는 없을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을 향한 길에 이런 식으로 현대가 포장하고 다리 놓아줄 때 정부는 속으로 얼마나 고마웠을까. 아니 정부는 그걸 즐긴 정도가 아니라 부추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렇게 공들인 결실로 정상회담이 성사됐고 그 연으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최대 재벌 하나는 골병이 들고 말았다.

그런 식으로 돈을 쓰고도 견딜 기업은 세상천지에 없다. 물론 그걸 정상적으로 회계처리할 방법도 없다. 기업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그럴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잘 안다. 장부를 조작하는 분식회계를 하는 수밖에 없었을 텐데 계좌추적을 하면 그 내용이 들통나게 돼 있다. 그러면 기업은 할 수 없이 그 돈을 어디에 썼는지 국민 앞에 다 털어놓아야 한다. 그래서 정부기관들이 지금 일치단결해 현대상선에 대한 계좌추적을 막고 나섰을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추측일까.

한번 말이 꼬이면 거짓말이 계속 꼬리를 달아야 한다. 자고 깨면 거짓말 전선에 나서야 하는 관리들의 얼굴은 평소 필자가 알고 지내던 그들의 모습이 아니다. 욕하지 말자, 그렇게 말해야 하는 그들은 오히려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닌가. 관 주변에서 ‘계좌추적을 하면 현대가 망하고, 현대가 망하면 나라가 쓰러진다’는 식으로 국민 협박조의 막말들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면 이제는 정부가 갈 데까지 간 느낌이다.다시 ‘단돈 1달러’ 얘기로 돌아가자.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할 때 이 도시를 단장하는 데 쓰인 페인트까지 국내 기업에 부담시킨 사실을 정부는 국민 앞에 한번도 말한 적이 없다. 세계 최대 국립공원인 미국의 ‘옐로 스톤’ 입장료가 5달러인데, 금강산 들어가는 사람마다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입산료인 100달러씩을 북한에 내기로 한 것이 누구의 뜻이었는지도 정부는 밝힌 적이 없다. 그래 놓고 단돈 1달러를 준 적이 없다니, 내 지갑에서 안 나갔으면 안준 것인가.

▼계좌추적 못할 이유 있는가▼

공영TV들이 평양에서 ‘쇼’를 한번 할 때마다 수십억원씩 갖다 주고 그것도 모자라 텔레비전 수상기를 5000대씩이나 바치고 있는 게 남북관계의 현실이다. 장관급회담 한번 하려면 비료 몇십만t이 넘어가야 했고 이산가족이 한번 만나려면 식량 몇십만t이 건네져야 하는 게 오늘날의 남북관계다. 이 기준과 공식을 대입해 환산하면 정상회담이라는 ‘큰 선물’에는 한 4000억원쯤 들지 않았겠느냐 하는 게 이번 의혹논란의 시발이다. 단돈 1달러도 준 적이 없다는데 말이다.

북한에 준 것 자체를 놓고 인색하게 말하면 안 된다.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국민동의를 구해 공개적으로 그보다 몇배 더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국민 모르게 건네 주다가 정권 말기에 들통나니까 거짓말로 국면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이번 4000억원 대출의혹의 진상이라면 그 죗값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당당하게 계좌추적과 국회 국정조사를 받아들여 보라. 선택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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