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칼럼]김정태/시스템 은행인 그리고 CEO

  • 입력 2002년 9월 27일 18시 24분


어느 정보기술(IT) 서적에 나오는 우화이다. 수십년 전 뉴욕은 바퀴벌레로 몸살을 앓았다. 이때 뉴욕의 한 세일즈맨이 일간신문에 광고를 냈다. ‘확실한 바퀴벌레 퇴치기구(The Guaranteed Cockroach Killer Kit)를 판매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파는 기구란 너무도 간단했다. 지름이 약 10㎝, 두께가 2㎝ 정도인 납작한 원판모양 블록 2개와 설명서가 전부였다. 사용법은 다음과 같다.

‘1.바퀴벌레를 블록 위에 올려놓으세요. 2.다른 블록으로 바퀴벌레를 내리치세요. 3.압사한 바퀴벌레를 치우면 됩니다.’

이 사례는 자동화시스템의 유용성을 설명할 때 시스템의 지시대로만 하면(위의 사용법에서 1, 2번에 해당) 전산개발자나 사용자의 어려움(3번의 바퀴벌레 치우는 일)이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비유로 사용된다.

여기서 의문이 생겼다. 이 사용법에서 가장 어려운 게 무엇일까. 잽싼 바퀴벌레를 방구석에서 찾아 손으로 잡아오는 일이 가장 어렵지 않을까. 사실 이건 준비단계인 0번에 해당되므로 사용법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또 어렵게 1번처럼 바퀴벌레를 블록에 올려놓는다 해서 그 바퀴벌레가 2번처럼 ‘날 잡아 잡수세요’하고 얌전히 앉아 있을까.

올 추석연휴에 단행된 옛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전산통합과정을 지켜보면서 문득 위의 우화가 생각났다.

지난해 11월 합병 이후 우리는 고객에게 편리하고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과감히 투자해 세계 수준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하는 건 사람의 일이다.

블록 위 바퀴벌레처럼 항상 움직이는 문제점이나 가변적인 업무 상황을 명쾌하게 구체화시키는 일은 전적으로 사람(IT 인력과 사용자 모두 해당)의 몫이며 시스템이 대신할 수 없다. 시스템이 하는 것은 우리 대신 죽은 바퀴벌레를 치워주는 것(3번)뿐이다.

국민은행도 합병 후 국제모범사례에 입각해 각종 선진적 제도와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러나 변화의 원동력은 선진시스템이 아닌 직원들에게서 나온다. 새로 도입한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작동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직원의 자질과 역량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직원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를 위해 은행인의 의식개혁이 우선돼야 한다. 은행원이라는 보편적인 용어 대신 ‘은행인’이라고 부른 것은 ‘준공무원’이었던 과거 관료적 위상에서 시장경제논리에 입각한 진정한 금융기업인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국내의 의사 수보다 은행인의 수가 더 적다. 은행인도 의사처럼 독자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진 전문가 집단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잃게 된다.

마지막으로 은행도 모든 조직처럼 최고경영자(CEO)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CEO는 그 조직을 탄탄한 반석으로 끌고 가기 위한 길고 험한 여정에서 도약대(springboard)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 CEO는 큰 배를 모는 선장에 비유되지만 바람직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정확한 나침반의 역할도 같이 수행해야 한다. 즉 선장(CEO)이 선원에게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나침반) 배가 목적지까지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 조직에서도 모든 구성원이 공통의 목표를 향하여 CEO와 함께 같은 길로 나아갈 때만이 성공의 확률은 극대화된다.

우수한 선진시스템과 항상 공부하고 노력하는 은행인, 그리고 올바른 CEO 리더십이 삼위일체로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21세기 금융한국의 밝은 미래는 결코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김정태 국민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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