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남극탐험가의 기적같은 생존드라마 ´인듀어런스´

  • 입력 2002년 9월 13일 17시 31분


◇인듀어런스/캐롤라인 알렉산더 지음 프랭크 헐리 사진 김세중옮김/173쪽 3만원 뜨인 돌

1915년 7월 남극의 밤. 바깥은 영하 34도였고 사방은 온통 얼음투성이였다. 바람은 맹수처럼 포효했고 멀리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들렸다.

탐험대장 섀클턴이 침묵을 깼다. “거의 끝이 온 것 같군. 배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꺼야.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몇 개월이 될 수도 있고 몇 주가 될 수도 있어.”

그러나 그들의 귀향은 무려 634일이 걸렸다. 그것도 하루하루가 목숨을 건 사투였다.

영국인 어니스트 섀클턴. 당시 가장 유명한 극지 탐험가들 중 하나였던 그는 27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남극 대륙 횡단에 나선다. 1911년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젠이 남극에 깃발을 꽂으면서 시작된 남극 탐험에 새로운 장을 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1914년 12월 남극권 관문인 사우스 조지아 섬 포경기지를 출발한 이후 1600㎞ 이상을 항해할 때 까지만 해도 그의 목표는 달성되는 듯 했다. 그러나 목적지를 겨우 150㎞ 앞둔 상황에서 표류하는 얼음 덩어리들과 강한 바람에 떠 밀려 항해를 중단해야 했다.

얼음의 압력으로 배까지 부서지고 지옥같은 얼음 위 생활이 시작되면서 구명보트 3척에 의지한 채 비상 식량과 물개 펭귄으로 연명하며 오직 무사 귀환을 목표로 28명의 사내들은 사투를 벌인다.

이 책은 엄밀히 따지면 사진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타임지로부터 일급 포토 저널리스트라는 평을 받은 바 있는 프랭크 헐리가 당시 탐험에 동승해 찍었던 사진들과 미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섀클턴의 남극 횡단 탐험’을 엮은 것. 아마존을 비롯한 인터넷 서점에 290여 종에 달하는 섀클턴 관련책이 있지만 그 중 제일 인기있는 책이다.

얼음과 바다를 배경으로 섀클턴과 탐험 대원들의 영웅적인 사투는 한 편의 영화를 보듯생생하게 구현되어 있다.

탐험기가 늘 그렇듯, 책에는 역경을 이겨 낸 인간 승리가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성공이 아닌 실패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때로 실패는 성공보다 더 값진 것이 될 수 있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인간이라면 모두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탐험가에게 있어 목표를 눈 앞에 두고 포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만약 섀클턴이 냉정하지 못했거나 욕심이 더 많았다면 그와 대원들은 남극 횡단에 성공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그들은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섀클턴은 ‘회귀’라는 포기의 길을 선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언젠가 기회는 온다.”

절대 고독의 공간에 유폐된 사내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마음으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은 섀클턴의 리더쉽 때문이었다. 이 책이 단순한 탐험기를 넘어 리더쉽 책으로도 읽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원 프랭크 와일드는 비상 식량을 아끼느라 며칠 밤 낮을 굶은 어느 날 밤, 섀클턴이 자기 몫의 비스킷 4개 가운데 1개를 자신에게 강제로 먹였던 일을 기억하며 “당시에는 그 순간의 (대장의) 그런 행동이 자상하고 호의적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수천 파운드의 돈으로도 결코 살 수 없는 비스킷이었다”고 회고했다.

프랭크는 이날 일이 삶과 인간에 대한 생각을 영원히 뒤바꾼 사건이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2년 동안의 처절했던 여정을 마치고 돌아 온 대원들은 한결같이 “최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더라도 섀클턴이 리더라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유일한 축복은 섀클턴의 부하였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이 책은 한편의 자연 다큐 멘터리를 보는 듯 하다.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았던 태초의 대 자연의 아름다움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자연이 만들어 낸 거대하고 끝이 없는 조각그림이다’.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얼음꽃은 분홍색 카네이션이 만발한 꽃밭을 닮았다.’ ‘이렇게 거칠고 험한 해안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눈이 내리고 구름이 베일을 벗으면 이 황량한 절벽에서도 심오한 웅장함이 느껴진다. 경이롭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황량한 웅장함을 간직한 땅이다.’

절망의 끝에서 나약한 인간들의 밑바닥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아픔이지만, 약한 인간들이 한오라기 희망의 끈을 붙잡고 다시 도전해 성취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기쁨이다. 그들에게 절망과 희망을 함께 갖다 준 남극의 대 자연 속에서 그들이 얻었던 것은 ‘삶과 사람에 대한 겸손’이었다. 원제 ‘The Endurance’(1999).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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