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피해/호남]태풍 피해로 시름에 빠진 농촌 들녘

  • 입력 2002년 9월 2일 16시 50분


2일 전남 나주시 금천면의 농민이 태풍으로 떨어진 배를 움켜쥐고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제공 전남일보
2일 전남 나주시 금천면의 농민이 태풍으로 떨어진 배를 움켜쥐고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제공 전남일보
태풍 루사는 풍년 농사를 기대했던 '농심(農心)'을 멍들게 했다.

추석 대목을 앞두고 피해를 본 전국의 과수재배 농민들은 "이제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며 시름에 잠겨 있다. 수확을 목전에 둔 농민들도 "올 농사를 망쳤다"며 탄식하고 있다.

2일 오후 전남 나주시 금천면 신가마을 들녘. '나주배'로 유명한 이 일대 과수원에는 부러진 나뭇가지와 으깨진 배들이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주민들은 예년 같으면 탐스럽게 익은 배를 상자에 담기 바쁠 때이지만 지금은 떨어져 썩어가는 배를 치우면서 한숨을 짓고 있다.

"한 그루에 80개가 넘게 배가 달렸었는데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은 나무가 태반입니다. 태풍이 1주일만 늦게 왔어도 수확을 끝낼 수 있었는데…."

6000평의 밭에 배 농사를 짓고 있는 김영선(金永善·41)씨는 "추석을 앞두고 4.5t 정도의 배를 수확할 예정이었으나 태풍으로 80% 정도가 떨어져 1200만원의 피해를 봤다"며 "무엇보다 다음달 수출 계약 물량을 납품하지 못하게 돼 걱정이 태산"이라고 말했다.

전국 배 생산량의 12%를 차지하는 나주지역은 3600여 농가가 2967㏊의 밭에서 7만t 정도의 배를 재배, 매년 1500억여원의 소득을 올려왔다. 그러나 이번 태풍으로 전체 재배면적의 70∼80%가 낙과 피해를 봐 수확량이 예년의 4분의 1 수준으로 줄 것으로 예상된다.

포도 주산지인 충북 영동지역 농민들도 시름에 젖어 있다.

4695농가에서 2411㏊의 밭에서 포도를 재배하고 있는데 평균 30∼40%의 포도가 떨어져 지난해 수확량 5만2260t의 절반 정도만 수확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영동읍 주곡리의 한정석(韓正錫·69)씨는 "70평생 처음 겪는 물난리로 애지중지 키워온 7년생 포도나무 1500여 그루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며 "다시 포도나무를 심어도 살아 생전에 포도를 수확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국내 사과 생산의 65%를 차지하는 경북 지역에서는 사과 재배단지 1만7000㏊ 가운데 3000㏊에서 낙과 피해가 발생했다. 경남에서도 배와 사과, 단감 재배단지 3000㏊에서 큰 피해가 났다.

벼 피해도 심각해 수확철을 앞둔 농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농경지 피해가 가장 심각한 전남 지역의 경우 전체 농경지 21만3000㏊ 가운데 2만6077㏊의 벼가 쓰러지거나 물에 잠겨 감수(減收)가 불가피해졌다.

전남 나주에서 1만여평의 벼농사를 짓고 있는 이원근(李沅根·44)씨는 "피해가 심한 3000여평은 아예 수확을 포기해야 할 형편"이라며 "이삭이 팬 뒤 한창 여무는 시점에서 피해를 봐 수확량이 예년의 절반 정도로 줄 것 같다"고 말했다.

전체 농경지의 8%인 1만1749㏊에서 벼가 쓰러지거나 물에 잠기는는 피해를 본 전북 지역 농민들도 실의에 차있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손원철(孫元哲·46)씨는 "산간지역이라 대부분 조생종 벼를 심기 때문에 이 달 중순부터 수확이 시작된다"며 "수확을 불과 보름 앞두고 누렇게 익은 벼가 흙더미에 덮힌 모습을 보니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나주=정승호기자 shjung@donga.com

남원=김광오기자 ko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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