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입장바꿔 생각해봤습니까 '앵무새죽이기'

  • 입력 2002년 7월 5일 17시 55분



◇ 앵무새 죽이기/하퍼 리 지음 박경민 옮김/409쪽 800원 한겨례

- '사랑의 집중'

붉은 물결이 사라진 광화문 거리를 보면 묵직하게 올라오는 허탈감을 지울 수 없다.

게임은 이겨야 한다. 그러나 삶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게임은 순간이지만,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지난 6월 우리의 환희, 집중, 분출은 무엇이었나, 이것을 지속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열정을 삭이자 이런 생각들이 밀고 올라왔다.

‘앵무새 죽이기’는 여기에 작은 실마리를 제공하는 책이다. 이제, 축제를 끝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름아닌, ‘사랑의 집중’을 넘어선 ‘사랑의 확산’이라고 말한다.

-편견과 이해

책의 줄거리는 한 정의로운 백인 변호사가 백인 여자를 성폭행 했다는 혐의를 받던 흑인을 변론한다는 내용이다. 무대는 대공황 직후, 제 2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직전인 암울하고 궁핍했던 1930년대 미국 앨라바마주의 조그만 마을이다.

화자(話者)는 백인 변호사(애티커스)의 어린 딸(스카웃). 일곱 살부터 열 살까지 마을 사람들과 아버지 곁에서 겪었던 일을 시종일관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적어 내려간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 이 책을 인종 차별에 대한 경고로 읽었다. 그러나, 이 책의 독법(讀法)은 이제 달라졌다. 이 책의 주제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사랑’이다. 그 놈의(^^) ‘사랑’ 때문에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상황에 놓였어도 끝까지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놓지 않는 진실하고 올곧은 사랑말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백인 변호사 애티커스다. ‘큰 길 한가운데 있을 때나 법정안에 있을 때나 똑같은’ 어쩌면 너무 교과서적이어서 차갑게 느껴지는 애티커스. 그는 흑인을 변호한다는 이유로 손가락질 받는다며 울먹이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든 변호사들은 생애 중 가장 중요한 공판이 있다. 아빠에게는 이번이 그렇다. 앞으로 학교에서 너희들이 이 일로 불쾌한 일을 겪게 될거다. 그때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상관하지 말고 주먹이 아닌 머리로 싸우거라.’

운명의 잔을 지나치라는 동생의 조언에는 이렇게 대꾸한다.

‘그렇게 하면 난 아이들을 마주 대할 수가 없어. 난 아이들이 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병적인 관념(흑인무시)에 물들게 하고 싶지 않아. 이성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흑인이 관계되는 일이면 왜 미쳐 날뛰는 지 모르겠어. 난 아이들이, 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아빠에게서 해답을 듣길 원해. 때로 곤란한 상황이 될 지라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싶어.’

이 책의 등장 인물들은 나름대로, 저마다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다.

전반부의 주요 인물인 ‘아서 래들리’는 어린 여주인공이 태어나서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청년. 그의 집은 1년 365일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마을 사람들에겐 공포와 두려움, 의혹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는 부모의 집착이 빚은 희생양이었다. 즐거움까지도 죄악으로 여기는 침례교파 아버지의 종교적인 집착, 한때 불량했던 아들을 밖에 내놓으면 집안의 명예를 더럽힐까 두려워 아들의 마음과 몸의 빗장을 닫아 건 아버지 자존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결국, 아서는 주인공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에 그녀를 구해 주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면서 주인공과 대면한다. 그를 통해 스카웃은 ‘남의 입장에 서 보지 않는 이상 결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두보스 할머니’도 마찬가지. 할머니는 추하게 늙은 얼굴과 퉁명스런 말투 때문에 마을의 ‘왕따’였다. 검둥이를 변호한다고 아버지를 욕한 데 앙심을 품고 그 집 화단을 망친 아이들에게 아버지 애티커스는 한달간 할머니 곁에서 책을 읽어 주라는 벌을 내린다. 얼마후 할머니는 세상을 떠난다.

장례 후 아버지는 ‘비난하고 욕했던 사람에게 오히려 잘 해주는 이유가 뭐냐’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달 전 할머니는 유산상속 문제로 나를 불렀다. 이 세상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떠나고 싶다며 모르핀 주사를 거절했다. 어린 네가 책을 읽어줌으로써 할머니는 모든 정신과 육체를 한 곳에 집중해 조금이나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분은 훌륭하셨다. 나는 너희들에게 진짜 용기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총이나 들고 있는 어줍잖은 용기가 아니라 진짜 용기,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배려말이다. 모든 것에 매이지 않고 살려 했던 할머니야말로 용감한 분이었다.”

아이들은 할머니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실체와 인간은 겉이 아닌 내면의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흑인 톰을 유혹하고 곤경에 빠뜨린 백인 처녀 마옐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인간이었다. 그녀는 일곱 동생을 키우면서 아버지의 상습 폭력에 휘둘려 집안에만 갇혀 살았다. 허드렛 일을 도와주던 톰은 그녀를 인간적으로 대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결국, 톰을 유혹하는 장면이 아버지에게 들키면서 죽도록 두들겨 맞는다. 그리고 술주정뱅이 백인 아버지는 ‘흑인이 백인 여자를 강간하려 했다’고 고소한다.

여기서, 감동을 주는 대목은 톰의 행동이다. 톰은 그녀의 외로움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른들과 한번도 키스한 적이 없다며 제게 키스를 했고 저를 안았습니다. 난 그저 그녀를 돕고 싶었습니다.’

톰은 법정에서 자신의 진실한 증언이 그녀를 모함하는 일이 될까봐 괴로워 했다. 톰이 그녀를 성폭행 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가 나왔지만 배심원들은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는 며칠 뒤 탈옥하다 들켜 총살당한다.

- '사랑의 확산'

이 책이 시대가 변했어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이처럼, 알고보면 상처투성이인 인간들이 나누는 사랑때문이다.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국제화는 단지, 경쟁이나 생산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남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배우는 것이다. 월드컵을 통해 우리가 확인한 것은 ‘강한 대한민국’과 이 시대 지구라는 별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 만이 아니었다는 새삼스런 자각이었다. 우리도 이제, 나만을 향한 사랑의 집중이나 일시적 분출이 아닌 남을 향한 지속적인 사랑의 확산을 고민할 때가 아닐까. 월드컵이 우리 안에 있던 사랑과 정열을 끄집어 냈다면 이제 그것을 더 넓혀 선순환 시켜야 하지 않을까.

6월의 분출이 대형 파이프로 뿜어 낸 아날로그식이었다면 이제는 모세혈관으로 몸 속 깊이 스며드는 섬세한 디지털식으로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700만이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일에 비하면 훨씬 작고 쉬운 노력일지 모른다.

사족:이 책은 중반부까지는 다소 지루해서 책을 놓기 일쑤다. 인내를 갖고 후반부까지 읽은 다음 다시, 전반부를 훑어야 한다. 번역본도 좋지만 가능하다면 원서를 권하고 싶다. 쉬운 영어로 돼 있어 작가 특유의 암시와 위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제 To Kill a Mockingbird.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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