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허승호/월드컵 신드롬

  • 입력 2002년 5월 31일 18시 40분


너무 싸늘하다던 월드컵 분위기가 이제 과열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후끈 달아올랐다.

월드컵경기만큼 흥미로운 것은 ‘월드컵 현상’이다.

요즘 주말에 자녀들과 축구를 하며 놀아주느라 탈진할 지경인 직장인들이 적잖다고 한다. 축구할 공간이 부족하다보니 어린이들 사이엔 공터잡기 경쟁이 치열하다. 초등학생들은 월드컵 퀴즈에 열중하고 있고, 성인들도 상당수가 월드컵 반풍수(半風水)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곳곳에 광고 모델로 등장하고 있다. 요즘 그와 관련한 농담도 인기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의 ‘전광판 응원’은 특히 흥미로운 현상이다. 경기장에 가지 못한 ‘붉은 악마’ 응원단이 동아일보 전광판 등이 있는 광화문에 모여 조직적인 거리응원을 펼쳐왔고 가족 친구 연인도 함께 경기장의 열기를 공유했다. 지난번 한국과 프랑스팀의 평가전 때에는 1만명 이상이 모였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뒤처리가 깨끗했고 해산 과정도 질서정연했다. 광화문 네거리에 그런 인원이 운집한 것은 87년 6·10항쟁 이후 처음 있는 일.

전광판 응원은 한국인의 독창성과 적응력이 돋보이는 발랄한 아이디어다. 광화문에서 시작된 전광판 응원은 대회 기간중 잠실야구장 한강둔치 마로니에공원 월드컵공원 등 서울시내 10여 곳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한다.

과거 권위주의시대에는 ‘스포츠가 대중을 정치·사회 문제로부터 격리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많았다. 스포츠 섹스 스크린을 통해 대중을 우민(愚民)화한다는 이른바 ‘3S 효과’다. 그러나 이제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한국 사회는 깊이와 폭에 있어서 다양해지고 성숙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월드컵을 즐기면서도 각종 선거, 비리 척결 등 우리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문제에 대한 관심은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만 월드컵이 각종 비리와 게이트에 상처받고 실망한 국민을 위로해주고, 갈래갈래 찢긴 한국의 사회적 통합에 기여한다면 참으로 고맙겠다.

허승호기자 경제부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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