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27…잃어버린 얼굴과 무수한 발소리(27)

  • 입력 2002년 5월 22일 18시 31분


무당2 (어린애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거린다) 자식이 여덟이나 있었는데, 혼자서 밥지어 먹고, 혼자서 술 마셨어. 그러다 동네 어느 집의 돌잔치에서 잔치 음식을 먹고는 그 밤에 죽었다. 캄캄한 집안에서 배가 아파 죽겠는데, 아들 딸자식 이름 하나 부르지 못하고,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도 없고….

무당3 절해.

이신철 몇 번이죠?

무당3 세 번이야. 하느님 말고 니 조상한테 절해.

유미리와 이신철이 일어나 두 손을 들고 앉아 엎드리는 오체투지의 절을 하자 박수가 북을 두드린다. 세 무당이 두 사람의 등과 어깨에 망자용 종이 저고리를 비벼댄 후 두 사람의 몸 앞에서 길고 하얀 천을 묶었다가 풀기를 거듭한다. 죽은 자를 한에서 해방시키고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고풀이 의식이다.

무당3 (북소리에 맞춰 노래한다) 풀고 가시오. 천의 매듭, 만의 매듭 풀고서 극락정토에 가시오. 해가 지면 나무 아래 쉬어 가시고. 악운일랑 모두모두 거둬 가시오.

무당들은 다리를 상징하는 하얀 질베를 몸으로 찢어, 망자에게 길을 열어준다.

씻김굿의 모든 거리가 끝나자, 주무(主巫)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위엄이 사라져 시장에서 콩나물을 파는 마음씨 좋은 아줌마의 얼굴과 구분되지 않는다.

무당3 (신철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남도와 주기 좋아하는 중년 여자 같은 말투로) 이 사람은 너거 삼촌이다. 너거 엄마의 형제란 말이다. 낳은 배는 달라도 다 할배 자식 아이가. 목숨이 붙어 있을 때 일본에 불러서 삼촌하고 엄마하고 만나게 해주거라. 형제다 아이가. 형제 맞재? 만나고 싶을 거 아이가. 정말은 할매가 살아 있을 때 만났으면 좋았을 테지만, 몰랐재?

유미리 …밀양에 계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본에 있는 친척들도 별로 사이가 안 좋으니까….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