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청와대, '첩보영화' 주역인가

  • 입력 2002년 4월 21일 18시 08분


김대중 대통령의 3남 홍걸씨를 등에 업고 각종 이권에 개입한 혐의로 구속된 최규선씨가 구속 전 영장실질심사에서 한 발언이 사실이라면 현정권은 더 이상 정부로서의 명분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최씨는 “청와대 이모 비서관이 청와대 회의 결과 최규선을 내보내기로 했다. 부산에 밀항 준비를 해놨다고 말했다고 최성규 총경이 전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밀항 얘기를 했다는 청와대 비서관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펄쩍 뛰고 있고, 그의 말을 전했다는 최 전 총경은 해외도피 중이어서 오히려 의혹만 불어나는 형국이다.

그간에 벌어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여러 정황에 비추어 최씨 발언을 ‘첩보영화 같은 얘기’라고 무시하기는 어렵다. 최씨의 비리에 연루된 최 전 경찰청 특수수사과장의 해외도피 행각만 봐도 그렇다. 일주일 새 4개국을 경유하며 엊그제 미국 뉴욕공항에 도착했던 최 전 총경은 통상적인 출구가 아닌 특별통로로 유유히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의 귀국을 종용하겠다며 기다리고 있던 우리 영사관 측은 헛걸음만 한 꼴이다.

최 전 총경은 한국 경찰 측이 미국 공항당국에 아무런 요청을 하지 않았는데도 ‘상세입국심사 대상자’로 분류돼 3시간 가량 정밀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미국 측은 그 후 뉴욕총영사관 경찰 주재관의 면담 요청을 거부하고 최 전 총경을 특별통로로 빠져나갈 수 있게 ‘배려’했다는 것이다. 한국측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이 없었다면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 아닌가. 이러니 누군가 최 전 총경의 해외도피에 개입하고 숨어서 도와주고 있다는 의혹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최성규 도피 의혹’의 진상을 명백하게 밝히지 않은 채 청와대 측이 ‘최규선 밀항 권유는 없었다’고 펄쩍 뛰어봐야 국민이 믿을까. 두 최씨가 한 짝인 만큼 믿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를 풀지 않고는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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