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수경/“TV 켜기 겁나요”

  • 입력 2001년 12월 18일 18시 50분


“선정적이고 엽기적인 장면들이 어디 예고하고 나오나요? 무조건 아이들에게 TV를 보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언제 어디서 그런 장면들이 튀어나올지 몰라 TV 켜기가 겁나요.”

18일 본보가 보도한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의 저질 사례 기사를 보고 홍민숙씨(41·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는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같이 하소연해왔다.

그는 가족 시청 시간대에 선정적인 장면이 방영되자 방송사에 항의 전화를 걸기도 했다. 그러나 몇 차례 전화가 돌려진 뒤 그가 얻은 것은 “담당자가 없다” “검토해 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실제로 각 프로그램의 인터넷 게시판에는 지상파 방송의 품질을 문제삼는 항의성 의견이 이어지고 있으나 방송사들은 묵묵부답이다. 대학원생 강모씨(25)도 18일 “방송사 인터넷 게시판에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수차례 올렸으나 프로그램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결국 시청자들의 비판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 같다”며 e메일을 보내왔다.

방송 현장을 취재하다 보면 방송사들이 시청자들의 비판에 대해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한 PD는 “시청자 비판을 붙잡고 있을 만큼 한가한 PD가 얼마나 되겠느냐”며 “시청자 의견에 일일이 신경 쓰면 프로그램을 제대로 못 만든다”고 말했다. 또 다른 PD는 “시민단체가 ‘하지 말라’고 한 방향과 반대로 만들면 프로가 뜨더라”며 이상한 흥행 공식을 내놓기도 했다.

저질이 곧 흥행 공식이라는 방송사의 잘못된 인식 앞에 시청자들이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방송사와 시청자들의 이 같은 ‘괴리’에 대해 주부 박모씨(54)의 하소연이 차라리 ‘대안’으로 들렸다.

“요즘은 TV를 틀 때마다 이상한 장면이 넘쳐나 아예 꺼버려요. 며칠은 허전하더니 이제는 가족과 대화할 시간까지 생겼어요. 저질 프로그램에 시간을 빼앗겼던 게 억울하기까지 해요.”

김수경<문화부>sk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