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규민/술독에 빠진 나라

  • 입력 2001년 12월 18일 18시 45분


옛사람들은 술을 멋과 맛으로 마셨다. ‘꽃 사이에 홀로 앉아 한잔 술을 마시니 달이 찾아와 그림자까지 셋이어라. 달도 그림자도 술이야 마실 수 없지만, 그들과 더불어 이 봄 밤을 마냥 즐기리’라는 중국 주선(酒仙) 이백(李白)의 시 구절에도 술을 멋으로 마시는 풍류가 스며 있다. ‘술은 입으로 들고 사랑은 눈으로 든다.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참이라 깨달은 것은 이것뿐일까 하노라’로 시작되는 윌리엄 예이츠의 ‘술의 노래’ 역시 술의 멋스러움을 철학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술의 멋과 맛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학적으로 보면 서양 사람의 4%, 그리고 동양인의 25% 정도가 몸에 술을 분해하는 효소를 갖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선천적으로 술 못 마시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네 술좌석에서는 우월적 지위의 주당들이 만들어 낸 ‘민주적 방식’의 폭탄주가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있다. 폭탄주가 한 순배 돌고 난 후부터 술은 더 이상 맛과 멋으로 마시는 대상이 아니며 술판은 누가 먼저 쓰러지느냐의 대결장처럼 변한다.

▷허구한 날, 앉아서 숨쉴 틈조차 주지 않고 양주와 맥주를 섞어 목에 퍼붓는 술판이 계속되니 우리나라의 독주 소비량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2.13ℓ)의 5.61배인 11.97ℓ에 달한다는 소식도 놀랄 일이 못된다. 15세 이상 인구가 1인당 연간 14.4ℓ의 알코올을 섭취한다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중학생 이상 한국인이 소주로 환산할 때 매일 한 병씩을 거르지 않고 마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로 대음주국이라 아니할 수 없는 놀라운 통계다.

▷옛날 스파르타인들은 연회가 열릴 때마다 술을 잔뜩 먹인 한 무리의 노예를 끌고 들어와 청소년들에게 구경을 시켰다고 한다.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관찰한 후 스파르타인들은 ‘첫잔은 갈증을 면하게 해주고 둘째 잔은 유쾌하게 만들어주며 셋째 잔은 발광을 시작케 한다’는 교훈을 얻고 술에 대한 자제력을 키웠다고 한다. 그로부터 수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는 송년회라는 거대한 술독에 빠진 느낌이다. 전쟁 흉년 전염병을 다 합쳐도 술의 해악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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