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심규선/'일본황실은 살아있다'

  • 입력 2001년 12월 2일 20시 22분


기자는 3년 반이 넘게 일본에 살면서도 일본인들과 천황이나 황실에 대해 얘기한 기억이 별로 없다. 신문이나 방송의 황실 동정보도도 극히 정형화되어 있어 ‘예우는 하지만 중요한 뉴스로 취급하지 않는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한 일본인 교수에게 “일본인에게 천황은 어떤 존재인가”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평상시에는 잊고 산다는 점에서 한국의 종갓집 어른과 비슷하다”고 말해 고개를 끄덕인 적도 있다.

그러나 지난달 30일 마사코(雅子) 황태자비가 출산을 위해 황실전용 궁내청 병원에 입원한 뒤 출산(1일)과 전국 각지에서 열린 출산 축하모임(2일) 등에 대한 일본 언론의 보도와 일본인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면서 일본의 황실을 우리의 종갓집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모든 방송들이 정규프로를 중단하고 황태자비의 일거수일투족과 궁내청 관계자의 기자회견을 생중계했다. 각 방송국들은 지금까지 취재해 놓은 특집물들을 쏟아내면서 전국의 네트워크를 총동원했다. 홋카이도(北海道)에서부터 오키나와(沖繩)까지 전 일본열도가 축하무드로 들썩였다.

천황제는 일본의 독특한 문화유산이자 전통이다. 황손 출생에 대해 일본인이 열광하는 것을 놓고 가타부타 할 말은 없다. 다만 제3자로서 일본의 황실은 ‘역사의 화석’이 아니라 지금도 일본인에게 통합의 상징으로 마음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를 보며 월드컵 개막식에 천황을 초청한 한국과 일본간의 입장차이도 머리에 떠올랐다. 한국측은 천황이 한국을 방문할 경우 과거사문제 때문에 항의시위가 있을 수도 있으며 일본측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황실을 취재해온 한 일본기자는 “천황이 한국에서 시위를 만나면 총리 목이 날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황태자비의 출산에 대한 일본인들의 열광을 지켜보면서 그 이야기가 겨우 이해가 됐다.

<심규선 도쿄특파원>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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