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영식/“떠나는 배 잡아라”

  • 입력 2001년 11월 14일 18시 20분


“배를 보내지 말고 잡아둬라.”

6차 장관급회담의 우리측 수석대표인 홍순영(洪淳瑛) 통일부장관은 13일 오후 3시35분경 금강산여관에 있는 우리측 상황실에 내려와 이같이 지시했다. 막판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만큼 금강산 관광선 ‘설봉호’의 출항 시간을 늦추라는 지시였다.

결국 설봉호는 예정 시간보다 2시간 늦게 출발했다. 일반 관광객 580명 중 일부는 속초항에 도착한 뒤에도 출발 지연에 항의하며 금전 보상을 요구하는 소동을 빚었다.

이날 상황은 남북회담을 취재해 온 기자들에게는 낯선 장면이 아니다.

지난해 9월 23일 금강산여관에서 열렸던 2차 남북적십자회담 마지막 날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날 우리측 대표단은 회담장 철수를 공식 발표한 직후 “회담을 계속하라”는 본부 훈령이 내려오자 금강산 관광선의 출발을 연기토록 지시했다. 다만 관광선이 당초 예정보다 먼저 떠나버리는 바람에 출발 지연이나 항의 소동은 생기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열린 3차 남북장관급회담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해 9월 30일에도 우리 정부는 북측 대표단이 타고 돌아갈 서울행 여객기 출발을 2시간 가량 늦춰 가며 북한측을 압박했다. 승객들이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기다렸음은 물론이다.

북측과의 회담 전략상 때로는 ‘벼랑끝 전술’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일반 국민을 ‘볼모’로 잡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한 정부 관계자들의 태도다.

남북 합의 도출이라는 목적도 중요하겠지만 그렇다고 국민의 권익과 편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매번 이처럼 쫓기는 듯한 우리 정부의 태도가 혹시라도 ‘억지춘향’식으로 합의만을 만들어 내려는 이유 때문이라면 더욱 큰일이라는 걱정을 떨칠 수 없다.

김영식<정치부>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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